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5과)

열왕기(2): 솔로몬 이야기(1)(1-8장)


1. 열왕기 이해의 열쇠

  열왕기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솔로몬 기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은 솔로몬 치하에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과 인근 나라들 사이에서 강자로 등장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부요함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열왕기에서는 무려 11장이나 솔로몬에게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열왕기에서 이토록 솔로몬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에서 갖는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의 주제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솔로몬은 열왕기에서 "원형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원형적 인물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 뿐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솔로몬은 한 편으로는 지혜로운 왕이며, 성전을 건축한 왕으로 통일왕국을 번영을 이끈 위대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이에 노동력을 착취한 왕이며 우상 숭배와 배도한 지도자로 묘사되고 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새로운 왕의 출현에 따라 희망을 갖다가 또 다시 실망하는 역사를 되풀이 했다. 그러나 남왕국 유다는 선한 왕과 악한 왕, 종교 개혁과 배도 사이를 반복했다. 이러한 남 유다 왕국의 역사를 보면 솔로몬 내러티브가 열왕기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솔로몬 내러티브(왕상 1-11장)의 구조는 율법을 지키는 지혜로운 왕으로서의 솔로몬의 모습(3-8장)과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말과 여자와 부를 추구하는 솔로몬의 모습(9-11장)으로 구분하여 대조되고 있다.


2. 구조

  그 동안 비평주의 학자들은 왕상 1-11장의 내러티브를 전설, 예언, 고고학적 데이터, 명단, 설교 등의 이질적인 자료가 혼합된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들은 솔로몬 통치 기사를 통일된 구조나 지속적인 주제를 가진 단락으로 보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파커(Parker)는 "모순"이나 "불일치"를 열왕기 기자의 의도적인 내러티브 전략으로 보고, 이 전략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설득력 있는 구조를 찾아냈다. 아래의 도표는 그가 찾아 낸 구조에 약간의 표현성의 변형을 가미한 구조이다.

 A. 왕위계승 문제(1-2장):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B. 꿈 에피소드(3:1-15): 축복의 약속
     C. 국내정치
      1. 여인들과 지혜(3;16-28)
      2. 행정과 지혜(4;1-34): 히브리어 원문(4:1-5:14)
        D. 노동관련 문제
         1. 히람과의 교역(5:1-12): 히브리어 원문(5:15-27)
         2. 노역(5:13-18): 히브리어 원문(5:28-33)
            E.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긍정적인 태도(6-8장)
   B'. 꿈 에피소드(2)(9:1-10(상): 재앙의 위협
        D'. 노동 관련 문제
         1. 히람과의 교역(9:10(하)-14)
         2. 노역(9:15-28)
     C'. 국제정치
      1. 여인과 지혜(10;1-13)
      2. 부와 지혜(10:14-29)
             E'.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부정적 태도(11:1-13)
 A'. 왕위 계승문제(11:14-43): 솔로몬에서 르호보암으로: 왕국분열

  솔로몬 내러티브를 읽어보면 왕상 1-8장에 묘사된 사건들이 왕상 9-11장에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사한 꿈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고, 여인들과 지혜 에피소드, 히람과의 교역과 노역 등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열왕기 기자가 유사한 이야기의 반복을 통해서 솔로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자세히 생각해 보겠지만, 솔로몬 내러티브는 솔로몬의 긍정적인 단락(3-8장)과, 부정적인 단락(9:1-11:13)이 중심에 나타나고, 그 바깥 쪽으로 왕위 계승문제를 다루는 두 단락(A와 A')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부터 이 세부적인 단락들을 살펴보자.


3. 왕위 계승 문제

 3-1. 다윗의 노쇠함(1-4)

  솔로몬 내러티브는 왕위 계승과 연관관 이야기들이 반복되면서 솔로몬 이야기의 바깥틀을 형성하고 있다. 솔로몬 이야기는 왕위 계승이 큰 문제로 부각되면서 시작하고 있다(1-2장).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게 되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어서(삼하 5:4-5)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므로(2:11; 대상 29:27).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이때에 그는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1). '이불'('베가드')은 원래 원래 '덮개'란 뜻을 가진 단어로 의복이나 겉옷, 또는 이불(창 39:12; 왕상 22;10)을 의미한다. 그는 젊어서 수많은 망명 생활과 전쟁으로 온갖 풍파를 겪었으며, 말년에는 집안의 불화, 반란, 살인, 음모 등을 인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치고 말았다. 본서 초두에 다윗 왕의 노환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1) 다윗 이 더이상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었으며, 2) 이로 인해 아도니야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3) 솔로몬이 급히 왕으로 즉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노쇠는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윗의 신하들을 근심케 만들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을 위해 젊은 여인을 맞아들여서 다윗의 곁에서 그를 간호하게 해야된다고 요청했다. 젊은이의 온기를 받아 늙음 몸의 기운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대의 치료 방법 중에 하나였다. 고대 헬라의 명의 갈렌(Galen)에 의하면, 젊고 건강한 사람의 체온으로 노쇠한 사람의 체온 저하를 방지하는 치료 의술이 실제로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Galen, Mathus medicus, 8.7). 다윗의 신하들은 수넴 여인 아비삭을 구해다가 다윗을 섬기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녀와 동침하려고 하지는 않았다(2-4). 수넴은 나사렛에서 11.2km 정도 떨어진 작은 헬몬산의 남동쪽 기슭에 있는 잇사갈 지파의 고을로 현재의 '술렘' 또는 '솔람'이란 곳이다. 다윗이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은 것은 1) 그녀의 의무가 간호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거나, 2) 그가 노쇠하여 무기력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3-2. 아도니야의 모반(5-27)

  이러한 상태에서 왕이 되려고 나선 자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였다. 그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통치할 때에 학깃을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었다. 첫째인 암논은 압살롬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셋째인 압살롬은 반란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길르압은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대상 3;1). 아도니야는 남아 있는 자녀 중에서 장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도니야는 용모가 준수한 자로 다윗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6), 군대 장관 요압이나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같은 사람들을 포섭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다(7절). 그러나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뜻과 다윗 왕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있어서 장자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다(신 17:15). 그리고 이 선택은 이미 솔로몬에게 주어졌었다(삼하 7:12-17; 12:24,-5; 대상 22:6-10). 아도니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 그는 자기를 위해 병거와 기병, 그리고 호위병 50인을 예비하였다(5).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대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를 따르지 않았다(8). 사독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  아히둡의 아들이었다(삼하8:17). 브나야는 다윗의 전성기에 그렛과 블렛 사람을 관할했던 사람이다(삼하 8:18).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은 외국인 용병으로 왕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었고(38절), 브나야는 이들의 대장이었다(대상 18:17). 본래 브나야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서(대상 27:5) 레위인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무용으로 인해 다윗 왕의 시위대장으로 발탁된 것 같다(삼하 23:20-23; 대상 11:22-25). 그는 후에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의 반란 사건에 가담한 요압을 죽이고 군대 장관이 된다(2:28-35).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신임을 받는 왕궁의 조언자였다. 당시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나단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솔로몬에게 넘겨주도록 했으며(삼하  7:4-170), 또한 밧세바를 취한 일로 다윗을 꾸짖기도  했다(삼하 12:1-14). 그리고 나단은 솔로몬  출생시  하나님의  명으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 (Jedidiah,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라는 이름을 붙여 준 일이 있으므로, 일찍부터 나단은 솔로몬이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받은 바 있었다(삼하 12: 24-25). 시므이와 레이, 그리고 에발트가 누구인지는 확인된 것이 없다.

  아도니야는 에느로겔 근처에 있는 소헬렛의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들과 자기 신복들을 모두 초청했다(9). '에느로겔'(삼하 17:17) 또는 '엔로겔'(수 15:7)은 '정탐의 우물'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에서 멀지 않은 기드론 골짜기에 있다. 이곳은 잔치를 벌이기에  적당하며 지금도 예루살렘 주민의 휴양지이다. '소헬렛'은 '뱀'이란 뜻인데, 느헤미야 2:13의 '용정'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Benzinger). 이곳 소헬렛의 돌은 자연 그대로 제단이 될 수 있었다.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는 잔치 음식이 아니고 제사에 쓰이는 희생 제물이었다(민 28-29장), 아도니야는 제사 잔치를 베풂으로 반역의 거사를 개시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1) 제사 형식을 갖춤으로 종교계와 군부 실력자들의 회합 의도를 은폐시킬 수 있었고, 2) 자신의 거사 행위에 신적인 정통성이 있음을 나타내며, 3) 거사에 가담한 자들 상호간에 정신적, 종교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다윗은 여러 왕비로부터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상 3:1-9)을보면 아들만 대략 19명 가량 되었는데, 그 중에 아도니야가 넷째 아들이었으며, 솔로몬은 열 번째 아들이었다. 당시에 아도니야가 최연장자였으며, 솔로몬을 제외한 그의 동생은 모두 14명이었다. 이 모임에 아도니야는 솔로몬과 그를 지지하는 나단과 브나야는 초청하지 않았다(10).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를 찾아가서 그 소식을 고했다(11). 그는 아도니야의 모반을 무효화히기 위해서 지혜롭게 행동했다. 그는 밧세바를 먼저 찾아가서 다윗 왕에게 아도니야의 모반 소식을 고하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12-14). 나단의 말을 들은 밧세바는 즉시 다윗에게 들어가서 아도니야의 모반 거사를 알리고, 가만히 있으면 다윗이 다음 왕으로 정한 솔로몬과 자신은 죄인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15-21). 그리고 이때에 나단도 다윗에게 들어가서 아도니야의 거사 소식을 고했다. 나단은 다윗이 이미 자신에게 다음 왕이 될 사람을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고 말했다(22-27).

 3-3. 솔로몬을 왕으로 인정하는 다윗(28-40)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밧세바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29-30)." 밧세바는 이 말을 듣고 다윗에게 절을 하고 다윗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28-31). 그리고 나서 다윗 왕은 제사장 아도니야의 편에 서지 않은 대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다윗 앞에 오게 되자 다잇은 그들에게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솔로몬이 다윗의 노새에 탔다는 것을 결국 그가 다윗의 후게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기혼'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1) 본문에서 기혼이 예루살렘 보다 낮은 지형으로 나타나고 있고(33, 40절), 2) 이러한 표현은 흔히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론 골짜기를 지칭할 때 사용되며, 3) 갈대아 사본, 수리아 사본 등 여러 고대 사본 등이 기혼을 이 골짜기의 실로암 못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기혼은 실로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J. Hammond). 당시 이곳은 예루살렘성의 주요 수원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아도니야의 잔치 장소인 에느로겔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일부러 기혼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기혼으로 솔로몬을 데리고 가서 사독과 나단에게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을 삼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윗은 나머지 신복들에게 양각 나팔을 불어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솔로몬을 좆아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솔로몬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을 분명하게 했다(32-35). 이 지시를 들은 브나야는 1) 하나님께서도 다윗과 같이 말씀하시기를 원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솔로몬과도 함께 있기를 기원했다(36-37). 다윗의 사독과 나단, 그리고 다윗의 신복들은 다윗의 지시대로 기혼으로 가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그가 왕이 되었음을 공식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이 등극했음을 기뻐하는 환호로 인해 땅이 진동하였다. (38-40).

 3-4.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조건부로 용서함(41-53)

  이 소식은 곧 아도니야가 있는 곳에도 전달되었다.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그들에게 가서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았음을 보고했다(41-48). 이 소식을 듣고 아도니야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도망을 치고 말았다. 아도니야의 불의한 반역 거사 초대에 응했던 무리들은 솔로몬의 즉위 소식을 듣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뿔뿔이 해산하고 말았다. 그들이 그토록 쉽게 공포에 사로잡힌 것은 애초부터 확신이 없었으며, 2) 또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당황하여 급히 일어남은 용기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3) 처음부터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모인 무리들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후에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서 제단으로 가서 제단 뿔을 잡았다(49-50). 제단 뿔은 곧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튀어나온 돌기 부분이다(출 38:1-7). 제사를 드릴 때 여기에 짐승을 매기도 앴고, 또 희생 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했다(출 29:12; 시 118:27). 성경에서 '뿔'( 케렌)은 주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신 33:17; 삼상 2:10; 시 18:2; 75:10; 112:9). 그러므로 제단의 뿔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아울러 그러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약자와 억울한 자 및 죄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제단 뿔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하는 상징적 행위였다(Keil). 아도니야가 피신하여 붙든 제단 뿔은 분명 예루살렘의 시온 성막 내에 있는 번제단 뿔이었을 것이다(Keil). 솔로몬의신복들은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잡고 솔로몬이 용서하기 전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솔로몬은 앞으로 그가 더 이상 모반을 하지않고 선하게 행동하면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또 다시 반역할 마음을 품고 악하게 행동하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솔로몬은 사람을 보내어 아도니야를 제단에서 끌어내려 솔로몬 앞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아도니야가 자기 앞에 오게 되자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53).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아도니야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솔로몬의 이러한 처분은 그의 관용을 나타낼 뿐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명령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면 언제든지 징계와 연금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2:36; 삼하 14:24). 그러므로 최소한 왕궁을 노리던 아도니야에게 사적인 개인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앞으로는 분수에 넘는 짓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가 담겨있는 것이다.

 3-5. 다윗의 유언과 죽음(2:1-12)

  다윗은 자신이 죽을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을 남기게 되었다(1). 그가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였다. 1)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할 것(2:1-4). 2) 요압의 죄를 물어 그를 죽일 것(2:5-6). 3) 길르앗 사람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 것(2:7). 4)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제거할 것(2:8-9). 다윗은 세상을 떠나면서 솔로몬에서 스스로 강하게 하여 대장부가 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해하고, 하나님의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대로 지키라고 부탁했다. 다윗은 솔로몬이 이렇게 하면 그가 무엇을 하든지 또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을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다.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솔로몬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확실하게 이루실 것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요압이 무죄한 사람들, 즉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인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일에 대해서 그 죄를 물을 것을 부탁하였다. 요압은 태평성대에 개인의 원한과 야망을 인해 그들을 죽여 피를 흘렸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자신을 많이 도왔으며, 또 그를 해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그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죄를 처벌하도록 부탁했다. 다윗은 자신이 압살롬의 난 때에 자기를 도와 다시 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바실래의 은혜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솔로몬에게 그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도록 부탁을 남겼다. 다윗은 압살롬의 난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윗은 그때에 그가 자신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 그를 살려두었다. 그러나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를 제거하라고 부탁했다. 그 후에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0년(헤브론-7년, 예루살렘-33년)만에 죽게 되었으며, 솔로몬에 의해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 솔로몬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며 이때에 나라는 심히 견고해지게 되었다(10-12).     

 3-6. 적을 제거하는 솔로몬(2:13-46)

  왕이 된 솔로몬은 그의 왕 위를 위협하는 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게 된다. 그가 제거한 정적들은 1) 왕위를 탐했던 형 아도니야(13-25), 아도니야 편에 섰던 2) 군대장관 요압(26-27)과 3) 대제사장 아비아달(28-35), 그리고 4) 게라의 아들 시므이(36-46)였다.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제거하게 된 일은 그가 다윗의 첩 수넴 여자 아비삭을 요구한 데서 비롯되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모친인 밧세바를 찾아가서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기의 첩으로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밧세바는 그의 요청을 솔로몬에게 가서 그대로 전달했다. 솔로몬은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여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시켜 아도니야를 죽이도록 명했다. 아도니야가 이러한 간청을 한 것은 아비삭의 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도니야는 이러한 요구를 통해서 왕위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의 첩이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후왕이 선왕의 첩을 아내로 삼음으로 자신의 왕위를 알리는 관습이 있었다. 밧세바는 이러한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솔로몬은 이러한 아도니야의 저의를 간파하고 그를 처형시켰다. 솔로몬은 일찌기 아도니야에게 "네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을 것이라"(1:52)고 말했다. 그리고 아도니야는 아비삭을 요구함으로 왕이 되려는 의도를 비치는 것을 보고 그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13-26).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죽인 후에 아도니야와 함께 반란에 참여했던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을 제거하였다.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직에서 파문하고, 그를 그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돌려보냈다.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고을로 제사장의 성읍이었다(수 21:18; 대상 6:60). 이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5.6km 정도 되는 곳에 있었으며, 예레미야의 부친인 힐기야의 고향이기도 했다(렘 1:1). 솔로몬은 그가 마땅히 반역죄로 죽어야했지만, 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었으며, 또 그 동안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을 함께 해 온 일로 인해 그를 파문하고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 일로 인해 엘리의 아들이 대제사장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던 하나님의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다(27). 군대장관 요압은 아도니야의 죽음과 아비아달의 파문 소식을 듣고 두려워 하였다. 그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즉시 여호와의 제던으로 가서 제단 뿔을 붙잡았다. 솔로몬은 요압이 제단 뿔을 붙잡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브나야를 보내어 요압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브나야가 요압에게 갔을 때에 요압은 제단 뿔에서 죽겠다고 고집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브나야는 그 소식을 다시 솔로몬에게 알렸으며, 솔로몬은 그의 말대로 그를 제단 뿔에서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받은 브나야는 즉시 제단 뿔에 있던 요압을 쳐서 죽였으며, 요압은 거친 땅에 있던 그의 집에 장사되게 되었다. 그 후에 솔로몬은 요압을 대신해서 브나야를 그의 군대장관으로 삼았다(28-35).

  그 후에 다윗은 다시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예루살렘에 와서 집을 짓고 그 곳을 떠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솔로몬은 만일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게 되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일종의 주거 제한 및 감시를 위한 조치였다. 솔로몬은 이렇게 함으로 그가 베냐민 지파에 대해 영향력을 미쳐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시므이가 살던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약 9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베냐민 지파의 요충지였다. 시므이는 솔로몬의 명령을 받아들여 그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후에 그의 종 중에 두 명이 블레셋 땅인 가드로 도망을 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드로 가서 도망친 자기의 종을 찾아오려고 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관습에서는 합법적인 일이었다. 그는 '가드'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곳이므로 별 탈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므이가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예루살렘을 벗어나기 전에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이러한 절차를 밟았다면, 그는 합법적으로 도망간 종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을 가볍게 여기고 행동하다가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다. 시므이는 직접 아기스 왕과 교섭하여 그의 종들을 되찾았다. 이러한 행동은 정치척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동이었다. 즉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시므이가 가드로 정치적 망령을 하거나, 그들과 동맹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삼상 27:1-2; 29:1-2). 이러한 시므이의 행동은 즉각 솔로몬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가 말한 대로 브나야를 보내어 시므이를 죽이도록 명령했다(36-46).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그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주변 세력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후에 나라는 솔로몬의 손에서 매우 견고해지게 되었다.


4. 꿈과 그 상징성

  솔로몬의 이야기 안에 균형과 데조를 이루는 것은 정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다. 솔로몬 이야기에는 꿈과 연관된 에피소드가 두 번 나온다. 소로몬의 꿈 이야기는 놀라운 대칭과 대조적인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꿈 이야기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주어지는 축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3:1-15). 그러나 두 번째 나오는 꿈 이야기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에 성전과 그의 왕국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9:1-1). 이러한 두 개의 꿈 이야기는 솔로몬이 말씀을 따를 때와,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에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4-1. 바로의 딸과 결혼함(1-2)

  솔로몬은 애굽 왕 바로의 딸과 결혼함으로 애굽과 인척관계를 유지했다. 솔로몬은 내부의 적들을 제거한 뒤에,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왕국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왕국 강화의 일환으로 정략 결혼을 통해 애굽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당시의 바로 왕은 애굽의 21대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서 35년간 애굽을 통치한 프수센네스 왕으로 추정된다(Ewald). 당시 애굽이 왜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서 이스라엘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국의 왕인 애굽왕들이 자기 딸을 다른 국가에게 주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솔로몬은 자기의 궁전이 건축될 때까지 바로의 딸을 예루살렘에 거하게 하였으며, 후에 궁전 공사가 마친 후에 바로의 딸을 위해 지은 궁으로 그녀를 인도했다(9:24). 이때에 아직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1-2). 엘리 시대에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탈취당한 후(삼상 4:11)에 여호와의 언약궤는 실로의 놉(삼상 21:1-9)과 기브온(대상 16:37-40), 그리고 예루살렘(삼하 6:16) 등으로 옮겨다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중심 장소를 잃고 각자 산당을 만들어 제사드린 것으로 보인다.

 4-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3-15)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했으며 다윗의 법도를 준행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솔로몬 왕은 왕이 된 후에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갔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를 위해 일천 번제를 드렸다(3-4).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해발 722m 정도 되는 성읍이다(수 9:3; 10:2; 18:25; 21:17; 삼하 21:1). 처음에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수 18:25), 후에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구별되었다(수 21:17). 기브온의 산당이 유명하게 된 것은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 한 후에 놉에 있던 여호와의 장막이 기브온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대상 16:39; 대하 1:3). 그 후로 여호와의 장막이 있는 기브온과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2대 제사 중심기가 되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큰 제단이 있는 기브온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신하들과 백성의 대표들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대하 1:2-6).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기브온에서 잠을 잘 때에 꿈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솔로몬은 자신이 부친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주의 백성을 올바로 재판할 지혜가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이 당시에 왕은 백성들의 중요한 재판을 친히 담당했다. 그러므로 어린 솔로몬에게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총명과 분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러한 총명과 분별력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러한 솔로몬의 기도는 "여호와의 마음을 만족하게 했다(5-10). 하나님은 솔로몬이 장수나 부귀, 또는 원수의 생명을 요구하지 않고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의 요구대로 그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함께 주어 열 왕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를 장수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솔로몬이 잠에서 깨어난 후에 그는 이일은 꿈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꿈은 평범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특별한 꿈이었다. 구약 시대에 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 방편 중에 하나였다(창 20:6; 삼상 28:6; 단 2:4). 따라서 이러한 꿈은 꿈에서 깬 후에도 그 꿈의 내용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고, 또한 자신의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솔로몬은 꿈에서 깬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렸다. 수은제(쉘라밈)는 번제르 드린 후에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였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 응답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기쁜 마음으로 모든 신하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11-15).


5. 여인과 솔로몬의 지혜(16-28)

  이제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이 여호와로부터 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 가지 재판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재판은 창녀 둘이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의 아기라고 주장하는 재판이었다. 이 '두 창기 사건'은 하위 재판관들에 의해 해결되지 못한 어려운 사건으로, 결국 최고 재판관인 솔로몬 왕에게까지 올라온 사건이었다. 따라서 솔로몬까지도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원만한 해결을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올바른 판결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하나님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던 것이다. 이 두 창녀는 같은 집에 머물면서 매춘 행위를 하는 창녀였다. 한 창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3일 후에 또 다른 창녀도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들이 해산할 때에 그 집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따라서 솔로몬 다른 증인을 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사자들의 말만 가지고 시비를 가려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창녀는 누워서 자다가 자기의 아기를 깔아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밤중에 일어나서 죽은 아기를 다른 여인의 품에 두고, 살아 있는 아기를 자기의 품에 두었다. 잠자던 창녀가 일어나서 아이에게 젖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리고 후에 그녀는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며, 다른 창녀의 품에 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창녀는 이 말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살아 있는 아기가 분명히 자기의 아기라고 주장했다(16-22). 솔로몬 왕은 두 여인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판결을 내렸다. 솔로몬은 서로 살아있는 아기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아기를 칼로 둘로 잘라서 공평하게 두 여인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진짜 그 아기의 어미가 자기의 아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그 아이를 죽이지 말고,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솔로몬의 판결대로 둘로 나누어서 공평하게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솔로몬은 누가 진짜 그 아이의 어머니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솔로몬은 아기를 죽이지 말라고 요청한 여인이 진짜 그 아기의 어머니이므로 그녀에게 살아있는 아기를 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두 창기 사건의 재판 사례'는 솔로몬의 권위가 백성들로부터 인정받고, 그의 통치를 인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 이러한 자발적 복종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 열왕기 저자는 재판 결과를 통해서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총명한 지혜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권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수 1:!7; 삼상 11:6-7; 왕상 1:37). 백성들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그와 함께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심으로 솔로몬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6. 솔로몬의 국내-국제 정치

  솔로몬의 통치의 이중적 모습은 백성의 삶의 질에서도 볼 수 있다. 솔로몬은 (4장)에서 탁월한 행정적인 지혜를 가지고 백성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삶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10:14-29)을 보면 이러한 솔로몬의 정치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국내적으로 여러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체계화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여 국경을 넓히고 조공을 거두어 들였다. 다윗은 이러한 모든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다윗도 그의 통치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일부만을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숱한 피를 흘려 이룩해 놓은 거대한 왕국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따라서 솔로몬의 역할은 거대한 왕국을 하나로 결합하여 유지하고, 대내외로 힘을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솔로몬은 무엇보다 정치, 행정, 외교, 세제 등의 조직을 더욱 확대 개편하고 체계화시키는 일과 중앙 집중화시키는 일을 착수해야 했다. 솔로몬의 신하들의 관직을 순서에서 살펴보면 솔로몬 시대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종교,행정, 관료가  우선시되는 평화의 시대인 것이다(Keil). 그러나 이전 다윗의 시대는 군대 장관이 최우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전쟁의 시대였다(삼하 8:16;20:23).

 6-1.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2)

  학자들은 여기에서 사용된 '아들'이란 말을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2:8; 창 29:5; 31:28 등) 아사이라를 사독의 손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의 난점은 시간상 사독의 손자가 당시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를 가능성이 적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아사리아의 부친 아히마아스가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 대제사장직 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사리아가 조부 사독의 이름하에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 아비아달과 사독이 대제사장직으로 있기는 했지만, 아비아달은 곧 파면되었고 사독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도록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사리아가 그들과 같이 기록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독은 매우 고령이었으며 솔로몬의 통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사독의 손자가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를 수 있는 나이는 계산상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Pulpit).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사리아의 직위인 '제사장'이 어떤 직위인가? 하는 문제이다. 카일(Keil)과 베르(Bahr)는 '제사장'('하코헨')이란 말을 '총리 대신'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들은 '코헨'이 (삼하 8:18)에서 '대신'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솔로몬 왕국의 관료 서열 중 맨 처음에 등장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즉 성경용례상 '코헨'이란 용어는 거의 대부분 순수히 '제사장'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고 솔로몬 왕국의 가장 큰 업적은 성전 건축 사업에 있는 것인 만큼, 모든 관료들 중 대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릴 수 있다. 즉 아사리아는 사독의 손자로서(대상 6:8,9), 사독이 고령으로 맡은 바  대제사장직을 수행치 못하게 되었을 때 부친 아히마아스를 대신해서 그 직분을 계승하여 대제사장으로서 솔로몬 왕국에서 봉사한 인물이다.

 6-2. 서기관과 사관-시사의 아들 엘리호렙과 여호사밧(3)

  시사는 (삼하 8:17)에 나오는 스라야, (삼하 20:25)에 나오는 스와, 그리고 (대상 18:16)에 나오는 사워사와 동일 인물로 보이며, 그는 다윗 시대의 서기관이었다. 서기관(소페림)의 임무는 나라의 공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과, 재정 문제를 담당했다(왕하  12:10). 이 직책은 세습이 된 것 같다. 시사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서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은 다윗 왕 때부터 사관으로 있었다(삼하 8:17; 20:24). 솔로몬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왕에게 충성하던 인물을 그대로 등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관(마즈키르)은 국사를 기록하고 왕에게 어떤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상기시켜 주는 임무를 맡았다(Dentan).

 6-3. 군대장관과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사독과 아비아달(4)

  '브나야'는 솔로몬의 영을 받고 아도니야의 반역에 참가했던 군대장관 요압을 죽이고 군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제사장은 사독과 아비아달이었다. 그러나 아비아들 역시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제사장 직을 박탈당했다.

 6-4. 관리장과 대신: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와 사붓(5)

  '나단'은 다윗 시대의 유명한 선지자 나단이 아니고, (삼하 5:14)에 나타나는 다윗의 아들 '나단'이다. 따라서 나단의 아들들인 관리장 아사리아와 대신 사봇은 솔로몬의 조카들이었다. 관리장'(알 하니차빔)은 '관장들'(나치빔) '위에서' 관리하고 지휘하는 직책이다. 관리장은 7-19절에 나오는 열 두 관장의 우두머리였다. '대신'(코헨)은 2절에서처럼 '제사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공동 번역도 '사제'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이 직책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반  제사장들과는 달리 다윗 시대와  마찬가지로(삼하 8:18), 왕의 영적이고 의례적인 일들에 대해 논의하고 조력하는 일종의 고문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이 직책을 설명하는 '왕의  벗'(,레에 함멜렉)이라는 말이 뒷받침해 준다. 당시에 '왕의 벗'은 공적 직무의 호칭으로서 명예와 경의의 직함으로 간주되었다. 다윗 시대에는 '후새'가 이렇게 불려졌다(삼하 15:37;16:16). 아마도 '대신'은 왕의 신뢰할만한 의논의 대상으로 일종의 고문의 역할을 맡은 직책으로 보인다.

 6-5. 궁내대신과 감역관: 아히살과 아도니람=(6)

  '궁내 대신'(알 하바이트)은 왕궁의 살림을 맡은 관리자이며 청지기였다(16:9; 왕하 18:18; 사 22:15). 궁중의 일을 총괄하는 이 직책은 전에는 없었던 것이며, 솔로몬의 부요하고 화려한 궁중생활 때문에 새로 생긴 직책이었다(23; 18:3 등). 아도니람은 아도람과 동일 인물일 것이다(삼하 20:24). 그 역시 다윗 시대때부터 같은 직책을 맡아왔다. 한편 '감역관'(알 하마스)은 세금과 부역도 담당했다. 이 직책은 도가 지나치면 종종 백성들의 미움을 받곤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후에 아도니람은 르호보암 때에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는다(12:18).

 6-6. 12 관장(7-20)

  솔로문은 또한 이스라엘 위에 열 두 관장을 세웠다. '관장들'(나치빔)의 주요 임무는 1차적으로 자기 지역에서 왕실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것으로, 일종의 '세금 징수관'이었다.  그들은 맡은 임무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 각 지방에서 도지사와 같은 정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Josephus). 그들이 담당한 구역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기존 열 두 지파의 구획과 유사하긴 하지만 꼭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필요한 물량을 일정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각 지역 생산량의 많고 적음을 따라 구역을 나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열 두 관장'을 둔 이유 역시 기존 이스라엘의 '12지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1년 동안의 물량 공급 횟수인 '열 두 달'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각각 일 년에 한달씩 왕궁에서 쓸 식물을 예비했다. 공급 품목은 아마도 각 지역의 토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현물이나 세금이었을 것이다.

  에브라임 산지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세겜 건너편까지를 말한다(수 17:14-18; 24:33). 이곳은 팔레스틴 중부의 산악 지대로 정착해서 살기 좋은 비옥한 땅이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벧엘과 실로에 사사 시대의 두 주요 성소가 있었다(Cundall). 마가스는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또한 위치도 분명하지 않다. 사알빔 은 (수 19:42)에 나오는 '사알랍빈'과 동일 지역이었다. 벧세메스는 어떤 때는 잇사갈 지파의  성읍으로(수 19:38) 기록되었다. 엘론벧하난은 (수 19:43)의 '엘론'의 변형된 명칭이거나 '벧하난'이라는 또 다른 성읍과의 결합된 명칭일 것이다. 아룹봇은 이 곳 이외에 다른데서는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곳이 헤벧 땅에 속한 어느 지역으로 보고 있다. 소고와 헤벧의 두 성읍은 크게 헤벧(Hepher) 땅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헤벧 땅은 해안에 위치한 샤론평원의 남부 지방이었다. '돌'은 갈멜 산남쪽으로 지중해 연안의 한 성읍으로, 이 성읍은 여러 세기 동안 중요한 항구 도시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전해한다(Reed). 한편 '돌 높은 땅'은 이 성읍과 샤론 평원 일부를 포괄하는 지역이다(Josephus). 이 곳은 지역 특성상 비옥한 샤론 평야를 끼고 있어서 왕실에 우량의 곡물을 댈 수 있었다. '벤아비나답'은 '아비나답의 아들'(the son of Abin-adab)이다. 이 아비나답은 이새의 둘째 아들이자 다윗의 형 즉 솔로몬의 큰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아비나답, 곧 아비나답의 아들은 솔로몬의 사촌이 된다. 다아낙과 므깃도는 므낫세 지파의 경내에 속했다(수  12:21; 17:11). 이스라엘은 다른 성읍들과는 달리 잇사갈 지파의 경내에 속하였다(수 19:18). 그리고 이곳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었(IDB). 사르단'(7:46;  대하 4:17)라고도 불리웠던 이곳은 여호수아의 영솔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  강물이 기적적으로 멈춰 쌓였던 곳이다(수 3:16). 또한 솔로몬 시대에는 히람(Hiram)이 이 곳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놋그릇들을 녹여부었던 곳이다(7:46). 벧스안은 므낫세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삿 1:27), 이스르엘 골짜기 동편 끝에 있었다(수 17:16).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는 사관으로 여호사밧(3절)과 형제일 것으로 보인다(Keil). 아벧므홀라는 벧스안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이며,  선지자  엘리사의  고향이다(19:16;삿 7:22).

  욕느암은 레위인의 성읍 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이 곳은 '깁사임'(수 21:22)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Bahr). 길르앗 라못은 갓 지파의 성읍으로(수 20:8), 혹은 '라못  길르앗'으로  불리운다. 이곳은 길르앗 지방 동북쪽의 중요 요새지로서 레위인의 성읍이며(수 21:38;대상 6:80), 요단 동쪽의 세 도피성 중 하나이다(신 4:43;수 20:8). 야일의 모든 촌은 (민 32:41)의 '하봇야일'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므낫세 지파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지방을 공격하여 거처를 마련했다. 그때에 므낫세 지파의 용사 야일이 빼앗은 성읍들은 후에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이란 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신 3:14;수 13:30). 바산' 곧 '아르곱'은 길르앗 라못(혹은 라못 길르앗)의 동북 쪽에 위치한 지역이다(신 3:4 주석 참조). 원래 이 지역의 60개 성읍은 바산 왕 옥(Og)의 성읍들로 모세 영솔하의 이스라엘이 탈취한  것이다(신 3:1-11). 이 성읍들은 높은 성벽과 문과 빗장을 가졌고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신 3:5). 따라서 '야일의 모든촌'과 아르곱 땅의 이 '성읍 육십'은 분명 구별된다(Keil). 마하나임은 얍복 강 북쪽에 있는 길르앗 지방의 중요 도시로 갓 지파에 속한 땅이었다(수 13:26,30,; 21:28). 본래 이 지명은 야곱이 지은 것으로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이다(창 32:1,2). 요단  동편의  이곳은  왕들의  피신처로  종종  이용되었다(삼하 2:8,9; 17:24-27). 잇도의 아들 아히나답은 (대하 9:29)에 나오는 '선견자 잇도'의 아들로 여겨진다. 납달리는 12 행정 구역 중에 최북단에 있는 납달리 지파의 영토였다. 납달리 서편에는 아셀, 남쪽에는 스불론, 잇사갈 지파들과 맞닿아 있다.

  아히마아스 - 카일(Keil), 헤몬드(Hammond)등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 인물을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Ahimaaz)일 것으로 본다(삼하 15:27; 17:17). 납달리 지역의 관장 '아히마아스' 역시 돌 지역의 '벤아비나답'과 마찬가지로(11절)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고대 사회의 풍습상 왕은 신하들 중 충성심이 강하고 유능한 인물에게는 이처럼 딸을 배필로 허락함으로 포상을 했으며, 동시에 왕실을 견고하게 했다. 아셀은 납달리 서쪽 곧 지중해에 연한 지역으로 아셀 지파의 영토였다. 아롯의 위치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고대 주요 역본들에는 '베아롯'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다와 단에 위치한 '바아롯'(수 15:24; 19:44)과는 무관하다. 후새의 아들 바아나는 '다윗의 벗'인 아렉 사람 후새의 아들이었다(삼하 15:32). 잇사갈은 잇사갈 지파의 영토로서 12절의 지역들 즉 다아낙, 므깃도, 벧스안 등을 제외한 이스르엘 평야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서북으로 스불론,  남으로 므낫세 사이에 있다(수 19:17-23). 베냐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수도 예루살렘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이 지역은 북으로 에브라임, 남으로 유다 사이에 위치하였다(수 18:11). 엘라의 아들 시므이는 아도니야의 왕위 찬탈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던 시므이일 것이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을 저지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패퇴시키고 오히려 그 땅을 차지하였다(민 21:21-35). 본문에 나오는 '길르앗 땅'은 13-14절의 벤게벧과 아히나답의 관할 지역을 제외한 요단 강 동남부 지역을 가리킨다(Keil). 우리의 아들 게벧은 '벤게벧'(13절)의 아버지였다. 열왕기 저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약석하신 일이 솔로몬 때에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창 13:16; 15:5; 22:17). 솔로몬 시대의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는 태평성대였다.  실제로 고고학은 이 시기와 관련된 많은 곡식 창고들을 발굴해 내었다.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는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축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6-7. 솔로몬의 부(21-28)

  솔로몬이 다스린 영토는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의 경계와 애굽 땅에 이르는 광대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하수는 유브라테스 강을  말한다. 솔로몬 왕국의 영토가 북으로 유브라테스 강에서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까지, 그리고 남으로는 애굽의 국경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언급은 (창 15:18)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약속의 성취였다.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러한 지역에 거주하던 나라들, 즉 모압, 소바, 다메섹, 에돔 등은 솔로몬에게 조공을 드렸다(21).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하루에 사용한 양식을 소개하고 있다. 솔로몬이 궁전에서 사용한 하루에 양식에 필요한 재료는 다음과 같았다.
 1) 곡식-가는 밀가루-30석, 굵은 밀가루-60석,
 2) 가축-살찐 소-10마리, 초장의 소-20마리, 양 100마리
 3) 수사슴, 노루, 암사슴, 살찐 새들

  1석은 대략 230리터로 추정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데니우스(Thenius)의 계산을 따라 본절의 밀가루 구십 석을 14,000명의 하루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으로 본다. 한편 여기서 '가는 밀가루'와 '굵은 밀가루'를 구별하여 기록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마 궁궐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었던 것 같다. 데니우스(Thenius)의 계산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고기의 양은 솔로몬 궁궐과 관련있는 14,000명의 인원이 각기 한근 이상을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량은 고대 동양의 다른 강대국 왕궁들의 그것과 비교하면 지나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솔로몬 왕국의 경제적 풍요를 가히 짐작케 할 수 있었다.

  이외에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4만 채가 있었으며, 마병은 1만 2천명이 있었다. 외양간'(우르와)은 말을 가두어 두는 '칸막이'나 말의 먹이를 주는 '구유'를 의미한다. 이것은 말 한 마리를 위해 준비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만'은 '사천'이란 숫자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Keil). 그 이유는 1) 병행 구절인 (대하 9:25)에서 '사천'으로 기록되어 있고, 2) (왕상 10:26)의 병거 일천 사백과 마병 일만 이천의 숫자로 미루어 '사천'이 보다 타당하기 때문이다. 한편 외양간이 있는 병거성은 동북쪽 국경 수비를 위해 므깃도와 하솔에, 블레셋에 대비해 벧호론과 게셀과 바알랏에, 그리고 에돔에 대비해 아라바의 다말등  각처에 건축되었다. 그리고 병거는 애굽, 헷, 아람 등지에서 수입해 왔다(10:29).

 6-8. 솔로몬의 지혜(29-34)

  이제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솔로모에게 주신 지혜가 어떠했는지를설명하고 있다. '지혜'('호크마')는 실제적(practical)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적절히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Keil). 원래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때는 '솜씨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장인 뿐 아니라 시, 음악 등 모든 문화의 분야에서 재능과 총명을 발휘하는 인물을 뜻한다(Dentan).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분별력과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다(Patterson). 또한 '지혜'는 온전한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자신과 하나님간의 온전한 영적 상태에서 나온다는 사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시 104:24; 잠 3:19; 사 31:2; 렘 10:12; 단 2:2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호크마)의  근본이라"(시 111:10),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호크마)요"(욥 28:28) 등의 성구는 이러한 사상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수 있다. '총명'('테부나')은 예리한 판단력으로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정확히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Keil). 이것 역시 '지혜'와 마찬가지로 매우 실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으며, 또한 넓은 마음도 주셨다. '넓은 마음'('로하브 레브')은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뜻한다. 원문의 뜻은 '큰 넓이를 가진 마음'이다. 특히 여기서 '마음'은 '두뇌','지식'의 뜻에 해당한다(Hammond). 그리고  '넓이'는 다양한 분야의 광범위한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두뇌의 용량을 말한다(Keil). '바닷가의 모래'라는 표현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많음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관용어이다.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의 모든 사람과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양 모든 사람'은 팔레스타인 동쪽과 동남쪽에 분포된 넓은 의미의 아라비아인들을 가리킨다(Keil). 따라서 여기의  '동양'은 현재 사용되는 의미와는 달리 당시 이스라엘 편에서 본 '동양'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하란, 메소보다미아인들을 포함하며, 동시에 스바, 아두매, 데마인들을 포함한다. 그런데 고대로부터 이곳은 문명과 문호의 발상지로 알려져 왔으며, 또한 신화적 내용을 담고 있는 많은 지혜 문서 및 다양한 격언적 지혜로  유명하였다. 피라밋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애굽은 기하학, 천문학, 의학 등 오늘날의 자연 과학과 관계된 실제적으로 분야가 매우 발달하였다. 따라서 당시 이러한 '애굽의 지혜'는 속담이 될  정도로  유명했다. 이 말은 솔로몬의 문화적 업적이 인문 과학과 자연 과학의 선진국이라 할 만한 나라들을 능가할 정도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솔로몬의 지혜는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아서 사방 모든 나라에 그 소문이 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에단'과 '헤만'은 시편의 저자로 보인다(시 88:1;89:1). 그리고 '갈골'과 '다르다'(다라)는 '에단'과 '헤만'과 더불어 (대상 2:6)의 족보, 곧 세라의 아들들로 등장하는 것외에는 더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이 네 인물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문화, 예술에 있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들보다도  뛰어났다고 말함으로써 솔로몬의 지혜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역사상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솔로몬은 잠언을 3000개를 말했으며, 1005개의 노래를 지었다. 솔로몬의 잠언 삼천은 후세에 다 전해지지 않았으며, 성경에 삼분의 일 정도만이 남이있다(잠 1:1). 솔로몬이 지은 노래 역시 후대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으며, 남은 것은 성경에 기록된 아가서와 시편 72, 127편정도에 불과하다. 성경에 기록된 솔로몬의 '잠언'(마샬)과 '노래'(,쉬르)는 솔로몬의 신적인 지혜가 반영된  것들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3:12). 그리고 그는 동식물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동식물에 대해서도 많은 학문적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졌다. 보통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는 이러한 학술 활동이 활발한 법이다. 레바논의 산들은 백향목의 주요 산지로서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  건축용  백향목을 수입한 곳도 여기였다(삼하 5:11; 7:2; 왕상 5:7). 백향목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일 만큼 크고 튼튼했기 때문에 자주 영광, 힘, 호화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우슬초는 관목류에 속하는 키가 작고 털이 많은 식물이다. 솔로몬은 가장 큰 나무에서 가장 하챦은 관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는 동물을 그가 사는 곳에 따라 나눈 것으로 모든 동물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식물학 뿐 아니라, 동물학에 있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논한다"는 말('다바르')의 기본 뜻은 '말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관찰하고, 연구하며, 저술하는 활동까지 포괄적으로  내포하는 단어이다(Keil). 이로 인해 솔로몬의 소문이 각 나라에 퍼지게 되었으며, 각 나라의 왕들이 그 지혜를 듣기 위해서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의 명성은 열방 중에 널리 퍼졌고, 결국 많은 나라의 왕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문화 예술 등 제반분야에서 선진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의 국가들은 솔로몬 왕국과의 교류를 적극원했을 것이고, 왕들은 직접 혹은 대사를 통해 접촉을 시도하고자 했을 것이다(5:1;10:1). 그리고  솔로몬은 개방 정책을 펴서 많은 방문객들을 맞아들였던 것이다(Wycliffe). 스바 여왕의 방문은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10:1-13).


7. 아람과의 교역(5:1-12)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의 히람과의 관계를 두 번 언급하고 있다. 5장에서는 솔로몬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나타난다. 히람은 밀과 기름을 받고, 성전과 궁전을 건축할 백향목과 재목을 보낸다(5:1-12). 솔로몬이 히람과 교역을 한 후에 평화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 교역이 공의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5;12). 그러나 히람과의 두 번째 교역은 지혜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관게였다. 히람은 금 120달란트의 대가로 갈릴리의 20개의 성읍을 받았다. 그러나 히람은 이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불평을 했다. 이것은 솔로몬이 히람과의 교역을 불신실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솔로몬은 약속의 땅을 이방인에게 넘겨주는 실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솔로몬의 태도는 하나님의 기업을 이방인에게 넘기는 것으로 비성경적인 행위였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람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축하 사절을 보냈다. 히람은 평소에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통해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1). 이 때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성전 건축을 도와달라는 서신을 보냈다(2). 솔로몬은 히람에게 부친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 왔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제 정세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가 된 만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성전을건축할 수 있도록, 전쟁과 대적자, 그리고 사고나 우환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주셨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히람에게 성전을 건축할 재목, 즉 백향목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향목은 성장하는 데 수백년이 걸리고, 곧고 아름다우며, 목재의 쓴 맛 때문에 병충해가 적은 나무였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매우 값진 건축자재였다. 솔로몬은 히람에게 백향목을 베어오는 일에 벌목을 잘하는 시돈 사람들을 동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솔로몬은 이러한 벌목공들에게는 자신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3-6). '시돈 사람'이란 명칭은 베니게 사람을 총칭하는 말이다.  본래 베니게는 도시 국가 형태로서, 곧 시돈과 두로의 두 주요 도시로 구성된 국가이다. 예전에는 두로보다 시돈이 보다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베니게인들을 '시돈 사람'이라고 불렀다. 백향목이 있는 지역이 시돈 지역에 속했고, 또한 시돈 성의 주민들이 보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추었기 때문에, 시돈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히람은 솔로몬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는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신 여호와를 찬양했다".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의 교역 제의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이스라엘과 탄탄한 정치적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통상 관계를 통해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베니게(두로와 시돈) 지역은 좁은 해안 지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작물 재배가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베니게는 이스라엘에 곡물 수입을 의존해야만 했다. 히람은 솔로몬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백향목과 잣나무를 제공하겠다고 대답했다. 잣나무 백향목보다는 못했지만, 병충해와 부패에 강하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튼튼하고 가벼워서 건축자재로 쓰기에 적합했다. 히람은 나무를 베어 레바논에서 바다로 운반해서, 그것을 뗏목으로 묶어서 솔로몬이 지정하는 것으로 보내어 그 곳에서 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기  기록을 보면 솔로몬은 뗏목을 풀 장소로 욥바를 지정했다(대하 2:16).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56km 정도 떨어져있었다. 이곳은 바위로 된 자연 방파제가 형성되어 있어서 천연의 항구였다. 히람은 솔로몬에게 그 나무를 베공받는 대신 왕궁에서 사용할 음식을 달라고 부탁했다. 베니게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뻗어 있는 길고 좁은 나라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페니키아(베니게)는 임산물이  풍부한 대신 농작물이 부족했다. 베니게 지역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평야 지대는 약 75 평방km에 불과했다(Josephus). 따라서 베니게는 식량을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히람은 자신이 약속한대로 솔로몬이 원하는 백향목을 제공하여 성전 건축을 도와다. 그리고 솔로몬도 히람을 위해 일 2만석과, 맑은 기름 20석을 주고, 해마다 이와 같이 히람에게 제공했다(7-10). 여호와께서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으며, 이로 인해 솔로몬은 히람과 평화 조약을 맺고 화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11-12).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과 히람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8. 솔로몬의 노동 정책(5:13-18)

  솔로몬 이야기에는 솔로몬이 일군을 징용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5:13-18)에 기록된 첫 번째 징용은 성전 건축을 위한 것으로 안식이 허락된 징용이었다. 그러나 (9;15-28)에 기록된 두 번째 징용은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과, 바명성, 그리고 국고성 건축을 위한 것이었으며, 거의 노예에 가까운 징용이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서 전국에서 3만명의 역군을 징용하였다(13). 이들은 이스라엘인들로서 15절에 언급된 이방인과 구별되었다. 그들은 셋으로 나누어서 세달에 한 번씩 레보난으로 가서 일을 했으며, 나머지 두 달은 집에서 쉬었다. 솔로몬은 역군을 징용하되 3달을 주기로 윤번제로 일하게 함으로 1년에 8개월 동안 생업과 가사를 돌볼 수 있게 하였다. 솔로몬은 이렇게 함으로 1) 노동의 효율성을 도모하고, 2) 이스라엘의 일상 경제가 정상적으로 유지되며, 3) 국민들이 자기 가정을 돌볼 수 있게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군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아도니람이었으며, 이들은 히람의 기술자들을 도와 벌목 작업을 돕는 가벼운 노동을 맡은 자들이었다(14). 또한 성전 건축 사업에는 이 외에도 7만명의 담군과, 산에서 돌을 뜨는 8만명의 사람이 동원되었다(15). '담군'과 '돌을 뜨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에 남아 있던 가나안 사람들었다(대하 2:16, 17;8:7-9). (왕상 9:21)을 보면 이들은 '노예 역군'(마스 오베드)이란 말로 부른 것은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노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담군'은 '짐을 나르는 사람'으로 벌목한 나무나 돌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을 것이다. '돌을 뜨는 자'는 '돌을 자르는 사람', 즉 '석수'를 의미한다. 이들의 숫자가 팔만이나 되고, 또 산에서 일한 것을 보면, 그들이 한 일은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기 보다 단순노동에 가까운 채석공의 일을 맡았을 것이다. 보다 전문적인 작업은 히람의 건축 기술자들이 담당했을 것이다. 한편, 목재의 벌목 작업과는 달리 돌의 채석 작업은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목재와는 달리 돌은 먼 거리 수송이 결코 쉽지 않았으며, 이스라엘 내에서도 채석은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예루살렘 성 바로 근교에 '솔로몬의 채석장'이라고 불리워진  대규모의 채석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성전의 기초석으로 사용된 크고 우아한 돌은 레바논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일꾼들 외에 이 역사를 동독하는 관리가 3천3백명이 동원되었다. 이 사람들이 일하느 사람들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16). '동독하는 관리'는 노동을 감독하는 관리들을 의미한다. 솔로몬의 건축 사역의 관리로 발탁된 총 수효는 3,850명인데, 이 중 3,300명은 하급관리이고, 550명은 고급 관리였다. 그리고 3,850명의 관리 중에서 3,600명은 가나안 족속 출신이었고, 250명은 이스라엘 출신의 관리였다. 솔로몬은 영을 내려 크고 아름다운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 성전의 기초석으로 놓게 하였다. (왕상 7:10)을 보면 이 '기초석'의 크기는 10규빗(또는 8규빗) 되는 정방형의 돌이었다. 일규빗은 약 46cm 정도였기 때문에, 성전 기초석은 각각 거의 4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큰 돌이었다. 이로 보아 '크고 귀한 돌'은 무거웠지만, 성전 기초석으로 쓰기에 알맞은 값진 돌이었다.  이처럼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지게 됨으로써, 솔로몬 성전은 역사적인 기공식을 거행했다(6:1). 이로써 모세 시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지고, 또 여러 장소에 분산되었던 하나님의 성소가 마침내 유일 중앙 성소(신 12:5)인 솔로몬(예루살렘) 성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전 기초석으로 놓이게 될 '크고 귀한 돌'은 하나 하나가 빈틈없이 꼭 맞아들어가도륵 8규빗 내지는 10규빗의 정방형 크기로 다듬어졌다. 그리고 이 돌을 잘라내고 다듬는 작업은 채석장 현지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6:7). 솔로몬의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 솔로몬의 건축자와, 히람의 건축자, 그리고 그발 사람들이 함께 그 돌을 다듬어서 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재목과 돌을 준비했다(17-18). '그발'은 트리폴리와 베이루트 사이에 위치한, 베니게 최북단 연안에 있는 도시이다. 헬라 시대에는 '비블로스'(Biblos)라고 명명된 이곳은 무역과 조선업의 중심지였다(겔 27:9). 따라서 유능한 해양 선원들과 건축 기술자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Kapelrud). '그발'은 두로, 시돈과 마찬가지로 베니게에 속한 한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발 사람'이 새삼 '히람의 건축자'와 나란히 언급된 것은 그들이 뛰어난 기술자로서 성전 건축 공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성전 건축 준비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70인역은 이 모든 준비를 갖추는 데 3년이 걸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추론은 아마도 본격적인 성전 건축 공사가 솔로몬 즉위 제 4년째부터 시작되었다는 6:1의 연대기적 진술에 근거한 것 같다. 왜냐하면 솔로몬과 히람의 협정은 분명 솔로몬 즉위 초에(5:1) 진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9. 성전 건축(6장) <참고지도: 성전 건축>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 즉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 시브월(2월)이었다(1). 이 480년의 해석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70인역(LXX)은 480년 대신 440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2) 요세푸스는 480년 대신 592년으로 잡고 있다. (3) 혹자들은 본문의 480년을 일종의 상징적인 세대수로 본다. 그러나 복잡한 계산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주장은 입증할만한 뚜렷한 근거없이 추측의 선에서 머물고 있다. 1) 광야 생활 40년, 2)  가나안 정복기 및 평정기 32년, 3) 사사 시대 331년, 4) 사울의 통치 33년, 그리고 5) 다윗의 통치 40년과 솔로몬의 통치 4년을 합쳐진 연도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는 주전 966년이므로 이렇게 보면 출애굽 연대는 주전 1446년이 된다. 출애굽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B.C. 1,440년 경으로 보는 주장이고('전기 연대설'-'15세기설'), 다른 하나는 B.C. 1,200년 경으로 보는 주장이다('후기 연대설'-'13세기설'). 벌도우(Bertheau), 뵈쳐(Bottcher) 같은 학자들은 여기 480년을 상징적인 숫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은 열왕기 저자가 12세대를 480년으로 계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적으로 한 세대는 20년 정도로 잡으면 12세대는 250년~280년 정도 되기 때문에 480년에서 약 200년 가량이 단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출애굽 연대를 주전 1200년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성전 건축 시기를  출애굽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은, 성전 건축은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하 3:1)에 의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는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이다(창 22:2). 그곳은 인구 조사의 죄를 범한 다윗에게 천사가 하나님을 위해 번제단을 쌓도록 지시한 장소(삼하 24:16-25), 곧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다(대상 21:15-27).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쳐 드리던 중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나타난 역사적인 장소였다(창 22:2,14).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해 건축한 성전의 크기는 다음과 같았다. 여기에서 언급된 '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전 본당을 가리킨다. 이 성전의 크기는 길이가 60규빗(45.6m) , 넓이가 20규빗(9.12m), 그리고 높이가 30규빗(13.68m)정도가 되었다(2). 여기에서 일규빗은 약 45.6cm로 계산되었다. 이 성전은 일반 백성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제사장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하나님의 거처였다. 성전 앞 쪽에는 낭실('현관')이 있었는데, 이 곳은 성전의 대기실  역할을 했다. 낭실의 크기는 길이가 20규빗(9.12m), 넓이가 10규빗(4.56m)이었다(3). 성소에는 안쪽보다 바깥 쪽이 더 좁은 붙박이 창문을 달았는데, 이 창문을 통해서 햇빛과 공기가 성소에 들어올 수 있었다(4). 그러나 지성소에는 이러한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암흑 속에 있었다. 또한 이 성전 벽에는 3층으로 돌아가면서 다락을 만들었으며, 그 다락 안에는 골방이 있었는데(5), 이 골방은 30개였다(겔 41:6). 이 골방은 (겔 42:13-14)을 보면 1)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장소나, 2)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 또는 3) 제사장들이 옷을 갈아 입는 장소 등으로 사용된 거스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곳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거처이기도 했다(시 134:1). 3층으로 된 다락은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1규빗씩 넓게 고안되어 있었다. 그 까닭은 윗층 바닥이 아래층의 양 벽에 좌우로 반 규빗씩 걸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6). 그리고 솔로몬은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면서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다. '턱을 낸다'(미그라오트)는 말은 '벽의 두께를 줄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각층 골방의 들보를 지탱하는 선반(턱)을 만들려면 윗층 벽의 두께를 1규빗씩 축소해야 한다. 또한 성전에 사용하는 돌은 채석장에서 미리 다듬어서 성전 안에서는 연장 소리를 내지 않게 하였다(7). 옛 율법에서는 제단을 만들 때에 '철기를 대지 말도록' 명령했다(출 20:25; 신 27:5. 솔로몬은 아마도 이러헌 옛 율법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려고 이렇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간층에 잇는 골방의 문은 성전의 오른쪽에 있었으로 나사 모양으로 사다리를 통해서 하층에서 중층으로, 그리고 중층에서 상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다(8).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완성한 후에 그 것을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지붕을 덮었다(9). 또한 솔로몬은 낭실이 있는 성전 전면을 제외하고 나머지 3면을 돌아가면서 다락 방을 건축하였으며, 이 방들은 백향목 들보로 서로 연결했다(10). 이 부속 건물은 3층 건물로서 각 층의 높이가 5규빗(약 2.3m)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3층 건물 전체의 높이는 15규빗(6.84m)이었지만, 약간의 여유있는 간격을 두었다면 대략 18-20규빗(약 8-9m)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 다락들은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 지어졌을 것이다. 이 성전을 지은 후에 여호와께서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전에 하신 약속을 다시 한 번확인해 주셨다.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에게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내가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11-13)."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기를 마친 후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안 벽에 입혔으며, 잣나무로 마루를 깔았다(14-15). 그리고 성전 뒤편에서 20규빗 되는 곳, 즉 성전의 1/3길이 되는 곳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으로 막아서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였다. 그러므로 성소의 길이는 40규빗빗이 되었는데(16-17), 이 안은 모두 백향목 널판으로 감싸서 돌이 보이지 않게 했고, 둘러 싼 백향목에는 박과 핀 꽃을 아로새겼다(18). 그리고 언약궤를 넣기 위해서 지성소를 만들었는데, 이 곳의 크기는 길이 20규빗, 넓이 20규빗, 그리고 높이가 20규빗이었다(19). 지성소의 모양은 완전한 정육면의 입방체였다. 이것은 모세 성막의 지성소 및 장차 천상의 거룩한 성 이 모양과 같다(계 21:16). 아마도 정방형은 '절대 완전'이나 '절대 거룩'의 개념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J. Hammond). 성전의 높이는 10규빗의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가장 무난한 견해는 지성소 위의 공간에 10규빗 높이의 '윗 다락'(대하 3:9)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솔로몬은 이 성소와 지성소의 널판과 지성소에 있는 제단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다(20-23). 이러한 금은 신성과 불변,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처소를 상징한다. 또 두 개의 그룹(천사)을 만들었는데, 한 그룹의 크기는 높이와 길이가 모두 10규빗이었다(24-26). 이 두 그룹은 모두 정금으로 입혔으며, 완성한 후에는 지성소에 두었다(27-28). 지성소와 성서의 사면 벽에는 모두 그룹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으며, 안과 밖의 모든 마루에는 금을 입혔다(29-30).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감람나무로 문을 만들었는데, 이 문이 크기는 벽 길이의 1/5이었다. 감람 나무, 즉 올리브 나무는 높이가 5-10m 정도의 물푸레 나무 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B. C. 3000년 경부터 소아시아에서 재배되어 왔다. 그리고 이 나무는 견고하고 내구성이 강해 희랍인들이 신들의 현상을 만드는데 종종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솔로몬은 이 감람목에 금을 입혀 그룹 형상을 만들었다. 이 문에는 그룹과 종려 그리고 핀 꼭을 아로 새겼으며, 그 위를 다시 금으로 입혔다(31-32). 그리고 나서 성소의 바깥 쪽에도 잣나무로 문을 만들되 두짝으로 해서 접을 수 있게 만들었으며, 그룹, 종려, 핀 꽃 형상을 새기고 그 위에 금을 입혔다(33-35). 이렇게 성소와 지성소를 만든 후에는 다듬은 돌 세켜와 백형목으로 만든 두꺼운 판자 한 켜로 성전을 둘러싸서 성전 안뜰을 만들었다(36). 돌과 백향목 판자는 안뜰의 담을 구성하는 재료들이었다. 여기에서 '켜'(투르)는 포개어 놓은 물건의 층을 말한다. 아마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세줄, 그리고 그 위에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줄을 쌓아 담을 둘렀을 것이다. '안뜰'은 (대하 4:9)에 나오는 '제사장의 뜰'에 해당될 것이다. 제사장들은 안뜰, 즉 제사장의 뜰에서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구별이 생겼을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의 기초를 제 4년 시브월(2월)에 놓았다(37). 그리고 제 11년 불월(8월)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모든 건축을 완공했다(38). 그러므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기간은 정확하게 7년 6개월이었다. 성전 건축에 걸린 이 기간은 고대의 다른 대건축물에 비하면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다. 에베소의 다이아나(Diana) 신전 건축은 무려 200여 년이 걸렸고(Pliny), 애굽의 피라밋 건축은 20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화려하고 정교한 성전을 완공하는 데 7년 걸린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 성전의 경우 비교적 규모가 작앗으며, 2) 많은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었고, 3) 다윗 때부터 세심한 준비를 해 온 점을 고려하면 이 기간은 적절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 솔로몬의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의 제작(7장)

 10-1. 솔로몬의 궁전 건축(1-12)

  솔로몬은 7년 반에 걸쳐서 성전을 건축한 후에, 또 다시 13년에 걸쳐서 자기의 궁전을 건축했다(1).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궁전을 지었는데, 그 크기는 길이가 100규빗(45.6m), 넓이가 50규빗(22.8m), 그리고 높이가 30규빗(13.7m)이었다. 이 규모는 성전과 높이만 같고, 나머지는 성전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혹자는 본문에 사용된 레바논 나무를 '레바논 숲의 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영역 성경 역시 '나무'를 '숲'이란  의미로  번역했다. 아마도 솔로몬의 궁전은 백향목의 숲으로 이루어진 시원한 그늘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궁전에는 네 줄로 백향목 기둥을 세웠으며, 그 기둥 위에 들보를 얹어서 만들었다(2). 그리고 기 둥 위이 있는 들보에는 15개씩 3줄로 골방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었다(3). 그런데 2절은 들보가 4줄로 놓였다고 언급한 반면에, 3절에서는 이것이 3줄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3절에 언급된 들보는 들보 위에 놓인 골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 궁전에는 창문을 15개씩 세 줄로 만들었으며, 창문들은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창틀은 각 층에 한 줄씩 있었으며, 각 층의 창은 방 맞은 편에 있는 창을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4). 한편 이 골방들의 용도는 병기고와 왕실 시위대의 거처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Bahr). 솔로몬 궁전의 모든 문들은 모두 큰 나무로 네모지게 만들었다(5). 그리고 각 기둥이 있는 곳에는 방을 만들어서, 이 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므깃도 궁의 유적을 통해 확인한 결과, 솔로몬 궁전은 당시 수리아 북방과 아나톨리아 남방에서 사용된 '비트-힐라리'(양 옆의 여러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 낭실을 통해 넓은 실내로 들어가는 형태의 건축양식) 구조로 건축 되었음이 확인되었다(Ussishkimn, King Solomon's Palaces). 그리고 그 낭실 앞에는 기둥과 섬돌(돌 층계, 또는 차양)가 있었다(6). 또한 솔로몬은 재판을 위한 방을 반들었다. 이 곳은 모든 마루를 백향목으로 깔았다(7). 그리고 솔로몬이 거처할 궁전은 이 방 뒤에 있는 다른 뜰에 만들었다. 또한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위해서도 같은 양식으로 궁을 만들었다(8). 이 집들은 안과 밖을 기초돌에서부터 처마까지 모두 귀한 돌을 톱으로 켜고 다듬어서 재료로 사용했다(9). 기 궁전의 기초석으로 사용된 돌은 길이 10규빗과 넓이 8규빗되는 돌을 사용했다. 이 기초석은 길이 4.5m, 폭 3.6m의 정도의 크기였다(10). 그 위에는 백향목과 귀한 돌이 있었고, 그 뜰은 성전처럼 다듬은 돌 세층과, 백향복 한층으로 둘러 담을 쌓았다(11-12).

 10-2. 놋으로 만든 성전 기구들: 두 기둥, 놋바다, 놋받침, 물두멍(13-47)

  또한 솔로몬은 두로에서 히람이라는 놋을 다루는 전문가를 데려왔다. 그는 높이 18규빅 둘레 12규빗이 되는 두 개의 기둥을 놋으로 만들어 성전 앞에 세웠으며, 그 기둥 위에 놋으로 높이가 5규빗이 되는 머리를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기둥 머리에는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을 일곱 개씩 만들어 얹었다. 그리고 두 줄의 석류를 그물 하나 위에 만들어서 둘러있게 하였다(13-18). 그리고 낭실 기둥 꼭대기에도 네 규빗의 머리를 만들어서 박합화 모양의 줄을 만들었으며, 두기중 위에 있는 둥근 곳에는 돌아가며 석류 200개를 만들었다. 이 두 개의 기둥을 궁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오른 쪽 기둥은 야긴이라고 불렀으며, 왼쪽의 기둥은 보아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두 기둥 위에는 백합화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19-22). 또한 히람은 놋을 부어 바다를 만들었다. 이 놋바다는 직경이 10규빗 높이가 5규빗, 그리고 둘레가 30규빗이었으며, 그 모양은 원형이었다. 그 가장 자리 아래에는 매 규빗에 10개씩 두 줄로 박을 만들어서 바다 주위를 두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 논바다는 12마리의 소가 받치고 있었는데, 각각 세 마리의 소가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었다, 이 논바다의 두께는 한손 넓이만했으며, 백합화 모양으로 그 가를 둘렀고, 약 2000밧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용적이었다. 한 밧은 22.7리터인데, 이를 약 23리터로 계산하면 이는 46000리터가 되는 양이었다(23-26). 그리고 물두멍을 받치기 위해서 놋받침 10개를 만들었다. 이 물두멍은 희생 제물을 씻는데 사용되었고, 성전의 좌우 양편으로 다섯개씩 있었다. 이 놋받침의 크기는 길이가 4규빗, 넓이가 4규빗, 그리고 높이는 3규빗이었다. 이 놋받침은 사각형으로 된 상자 모양이었다. 이 받침의 변죽 가운데에는 판이 있었다. '변죽'은 그릇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놋받침대의 사면 가장자리에는 받침대의 벽을 구성하는 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판 밑에는 이동할 수 있도록 바퀴 축을 달고, 그 곳에 바퀴를 달았다. 바퀴의 축은 받침대 속에 박혀 있었으며, 바퀴의 높이는 1.5규빗이었다(27-37). 그 후에 히람은 다시 물을 담는 물두멍 10개를 만들었다. 한 개의 물두멍에는 약 40밧, 즉 80리터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었다. 이 물두멍의 직경은 4규빗이었고, 앞에서 언급한 놋받침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놋 받침 5개는 성전의 우편에 두었으며, 5개는 전 좌편에 두었으며, 성전의 앞 우편 동남족에는 놋바다를 놓았었다(38-39). 또한 히람은 놋을 가지고 제단에서 사용한 부삽들과 대접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히람은 솔로몬을 위해서 성전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빛이 나는 놋으로 만들었다(40-45). 솔로몬 왕은 이러한 놋기구들을 요단 평지에서 숙곳과 사르단 사이의 차진 흙에 부어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만든 놋기구가 너무 많고 무거워서 솔로몬은 그 기구들의 무게를 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46-47).

 10-3. 금으로 만든 성전 기구들(48-51)

  또한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만들었다. 이때에 만든 성전 기구는 금으로 된 제단과, 떡을 진설할 떡상과, 성소에 죄우로 다섯 개씩 놓은 금 촛대와, 그 위에 놓일 금꽃과 등잔과 불집개와, 금대접, 주발, 숟가락, 불을 옮기는 그릇, 지성소 문에 사용할 금 돌쩌기였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 왕은 여호와의 성전을 위해서 만드는 일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이에 솔로몬 왕은 그 부친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전에 있는 창고에 두었다(48-51).          

 10-4. 언약궤 안치식(8:1-21)

  솔로몬은 성전을 완성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겨오기 위해서 장로들과, 각 지파의 족장들을 소집했다(1). 솔로몬의 소집령을 받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표들은 에다님월, 즉 7월절기에 솔로몬 앞으로 모이게 되었다(2). '에다님'은 '시내에 물이 흐른다'는 뜻이다. 유대 종교력으로 7월(오늘날 태양력의 9-10월에 걸쳐 해당)에는 건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다님은 이른 비가 내려 시내가 흘러내리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7월의 절기는 '초막절'(장막절)을 의미한다(대하 7:8; 느 8:14; 사 30:29; 겔 45:23,25). '초막절'은 칠월 15일에 시작하여 7일간 계속되는 절기로서, 모든 절기 중에서 가장 크고 즐거운 절기였다. 이 절기는 광야에서 유랑하며 초막 생활을 하던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초막절에는 율법이 낭독되었는데, 이를 보면 '초막절'은 언약 갱신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절기에 율법의 판이 담긴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초막적(장막절, 수장절)은 광야 생활 동안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에 광야 생활 이후 유리 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성전에 안치시키는 일을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율법에 기록된 규례를 따라 언약궤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메고 성전으로 올라갔다(3-4). 솔로몬과 그 앞에 모인 회중은 언약궤 앞에서 셀수 없이 맣은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하였다. 원래 언약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율법을 새긴 돌판이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는 이미 만나 항아리를 소실되고, 율법을 새긴 돌판만이 남아 있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하고 나올 때에 성소에는 구름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제사장은 이 구름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다(3-11). 시내 산과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실 때에 항상 구름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출 19:16; 24:15-18). 원래 구름은 하나님을 대면할 때에 인간이 죽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신의 옷이기도 했다(Moor). 따라서 성전에 구름이 덮힌 것은 모세 성막을 성소로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솔로몬의 성전을 자신의 임재 처소로 승인하셨음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성전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임을 선포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축복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여호와 앞에 기립해 있었다. 이때에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여 왕으로 삼고, 그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아들을 통해 성전을 건축이 왕성되었음을 선포했다(13-21).

 10-5. 솔로몬의 기도(22-61)
  언약궤 안치식을 마친 후에 솔로몬은 여호와 앞에서 다음과 같은 긴 기도를 드렸다.
1.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는 분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일을 이루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행하면 다윗의 자손 이 왕위를 계속 계승할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지켜달라고 기도한다(22-27).
2. 솔로몬은 자기가 지은 성전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거하시기에는 부족함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눈이 항상 이 성전을 지켜보시고, 이곳을 향해 비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기도한다(28-29).
3. 죄를 짓고 성전에서 용서를 구하면, 그 기도를 듣고 죄를 용서해 주소서!(30).
4. 성전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는 자들에게 공평한 심판을 내려주소서!(31-32).
5. 죄를 짓고 적에게 패했을 때에 성전에서 회개하면 용서하고 승리케하소서!(33-34)
5. 죄를 지어 기근이나 기타 재앙이 있을 때에 용서를 구하면 그 죄를 용서하고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주소서(35-40).
6. 이방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케 하소서!(41-43)
7. 전쟁터에서 성전을 행해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고, 범죄하여 이방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 그 곳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그 죄를 용서하고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44-51)
8. 솔로몬 자신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를 들어조소서!(52-53).

  솔로몬은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해 위에 언급된 모든 기도와 간구를 여호와께 드렸다. 그는 이 모든 기도를 마치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일어나서 큰 소리로 온 이스라엘 회중을 축복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셨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열조와 함께 하셨던 것같이 자신들과도 함께 해달라고 기도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자신과 백성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그들이 주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에 여호와만 하나님이신 줄을 나타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사명이 온 세상에 여호와를 나타내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들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말씀을 준행하며 지킬 것을 독려하였다(54-61). 성전 봉헌 시에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이렇게 순종과 헌신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10-6. 희생 제물을 드린 솔로몬(62-66)

  그 후에 솔로몬 왕과 그와 함께한 모든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여호와께 희생 제물을 드렸다. 언약궤 안치식(1-21)과 솔로몬의 봉헌 기도(22-61)가 끝난 후에, 마지막으로 거대한 규모의 화목제사를 드림으로 성전 봉헌식은 그 절정에 달했다. (대하 7:4-10)을 보면 이때에 악기를 동원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헌신, 친교의  표시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 솔로몬과 백성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억할만한 성전 봉헌식을 맞이하여 거대한 규모의 희생제를 드렸다(63). 이때에 솔로몬은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를 회목제물로 드렸다. 일부 학자들은 이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 기록을 과장이나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ntgomery, Thenius). 그러나 전반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이는 가능한 숫자이다. 왜냐하면 1) 보통의 화목제와 달리 성전 낙성식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위한 제사였으며, 2) 이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온 국민(가장및 대표들)이었고(65), 3) 원래의 번제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성전 앞뜰을 구별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64). 다윗 시대에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이 38,000명이었으므로(대상 23:3), 솔로몬당시의 제사장들의 수효는 대략 2,000-3,000명 정도였을 것이다(Keil). 그러므로 낙성식 기간의 7일 동안 소 22,000과 양 120,000의 희생 제물을 처리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 당시의 유월절에 양 250,000 마리가 2-3시간  동안에 제물로 드려졌다고 한다. 이때에 솔로몬은 두 주간, 즉 14일 동안을 절기로 지켰다. 이것은 성전 봉헌 절기 7일과 초막절기 7일을 합한 것이었다. 이때에 열왕기 기자는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그 절기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맛) 왕국의 남쪽 경계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였다(민 13:21; 수 13:5; 삿 3:3). 이 나라는 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에게 정복되었다. '애굽 하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서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으로 등장한다(창 15:18). 여기에 언급된 하수는 나일강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절기가 끝난 후에 모든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때에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위해 축복을 했다. 그들은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서 베푸신 축복을 인해 심히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62-66).  성전 봉헌식을 마루리 짓는 본절에서 솔로몬 대신 특별히 다윗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성전 건축이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단지 그 약속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Hammond).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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