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2과)

 사무엘하(3): 다윗 왕국의 위기와 극복(2) (14-20장)

다윗왕국의 확립(1-8장)

다윗왕국의 위기와 극복(9-20장)

부록(21-24장)

사울

전사

다윗 왕국의
성립

견고해진다윗
왕국

요나단의약속지킴

암몬수리아
전쟁

다윗의범죄

근친상간

압살롬의 반역과
극복

세바의
반역

진노

용서

다윗의용사들

다윗의
노래

진노와
용서


다윗

애가

사울가문과의 전쟁

블레셋정복

법궤운반

다윗언약

행정
제도

므비보셋대접

도전과
승리

밧세바
사건

암논을 죽임

압살롬
반역

다윗복귀

반역
진압

기브온
거민 원한
해결

군대조직

감사찬송

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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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세바의 반역과 극복(14장-20장) <참고지도: 압살롬의 반역>

1.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옴(14장)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돌아온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1). 암논을 살해하고 압살롬이 그술로 도주한 지 3년이 지나게 되자, 다윗은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압살롬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으며, 다윗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요압은 이를 눈치를 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압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드고아에서 슬기로운 여인 하나를 데리고 왔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였다. 이곳은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이자(암 1:1), 르호보암의 산성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대하 11:6). 요압은 그녀를 데려다가 초상을 치르는 여인처럼 위장시켰으며, 그녀에게 다윗에게 가서 할 말을 가르쳐 주었다(2-3). 요압이 이처럼 압살롬의 사면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다윗에 대한 충성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차기의 왕이 될 압살롬에게 환심을 얻어 자기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Leon Wood,). 만일 요압이 다윗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이 일을 했다면 그는 드고아의 여인 대신에 나단 선지자에게 가서 이 일을 부탁했을 것이다. 요압의 사주를 받은 여인은 다윗에게 가서 자신은 남편을 잃은 참과부라고 말했다. 히브리 사회에서 과부는 고아와 함께 특별한 동정과 보호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과부로 위장을 했다. 그녀는 다윗에게 자신의 남편이 죽고 그녀에게는 두 아들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들에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자기 형제를 죽인 아들을 처벌하기 위해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녀는 만일 나머지 한 아들마저 죽게 되면 자신은 더 이상 남편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소연했다(4-7).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처음부터 그 아들이 형제를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실수로 살인하게 되었고, 또 과부의 딱한 서정을 참작하여 그 아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녀에게 아무도 그녀의 아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8-11). 다윗은 만일 누구든지 그녀의 아들을 해치려고 하면 자기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윗은 자신이 그 사람이 그녀의 아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조치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만일 형제를 죽인 아들을 처벌하지 않은 일로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자신의 집에 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다윗이 형제를 죽인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기 형제를 죽인 압살롬도 용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알고,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해서 왕은 압살롬의 죄를 용납하지 않느냐고 우회적으로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그녀에게 이 일을 하도록 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다윗은 이러한 엄청난 일을 여인 혼자서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그녀에게 이 일을 그녀에게 시킨 사람이 요압이 아니냐고 다그쳤다. 다윗이 생각하기에 이러한 일을 꾸밀 자는 요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다윗의 판단은 옳았다. 결국 그녀는 할 수 없이 이 모든 일이 요압이 시켜서 한 일임을 자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고백을 통해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마침내 요압을 불러서 압살롬을 궁전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듣고 즉시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술은이스라엘 북쪽에 인접해 있던 아람의 소국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그의 집으로 가서 거하라고 지시를 하고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도 다윗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12-24). 이는일종의 연금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다윗 왕은 이러한 태도를 취함으로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표명을 한 것이다.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Lange). 다윗이 백성들 앞에서 형제를 죽인 압살롬을 묵인하면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적절한 조치였을 것이다(Lange, Patrick). 그러나 이러한 다윗과 압살롬 간의 불편한 관계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해 반역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선언한 징계가 성취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아무런 흠이 없었다. 그의 머리털은 매우 많아서 연말마다 깎았는데  그 무게가 200세겔이나 나갔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머리털은 힘과 미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빨리 자라는 것은 힘이 왕성하다는 것(삿 16:17)을 의미했다(Keil). 또한 머리숱이 많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 자신의 신비로움울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에 압살롬은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이 나뭇가지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는 세상에서 자랑하는 외모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보여준다. 여기서 왕의 저울로 계산한 세겔은 '왕실의 세겔'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무게를 측정하던 기본 단위는 세겔인데, 이에는 '보통 세겔'과 '왕실 세겔', '성소 세겔'이 있었다. 그 중에 왕실의 세겔은 보통 세겔의 1/5을 더한 중량이었다. 보통 세겔의 경우 한 세겔은 11.4g이므로 200세겔은 약 2.3kg에 해당되는 무게였다. 보통 사람의 머리털이 1년 동안 자랄  수  있는 평균 무게가 약 500g인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었다. 압살롬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누이와 같이 다말이라고 지었다. 압살롬의 세 아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18:18에서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서 한탄하면서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가 딸의 이름을 다말이라고 지은 것은 누이인 다말을 지극히 사랑했거나, 아니면 그 딸이 다말을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와서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다윗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압살롬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여전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부친만 원망했던 것 같다. 압살롬은 요압을 사람을 보내어 자기에게 오도록 했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의 요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으며, 요압이 압살롬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그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때에 압살롬은 요압에게 다윗이 용서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왜 자기를 그술에 있도록 그녕 두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느냐? 고 항의했다. 그리고 나서 압살롬은 만일 자기에게 용서 할 수 없는죄가 있으면 차라리 법을 따라 죽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압은 그 말을 듣고 다윗에게 나아가서 이러한 압살롬의 뜻을 전달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압살롬을 자기에게 불렀다. 이에 압살롬은 다윗에게 나아가서 땅에 얼굴을 대고 절하였으며, 다윗은 압살롬과 입을 맞추며 그를 맞이했다(25-33). 여기에서 입을 맞추는 행위는 화해의 표시이다. 특히 아버지가 범죄한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그를 완전히 용서했다는 표시였다(창 33:4;  45:15 ; 눅 15:20). 이로 보아 우리는 이제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압살롬을 단지 자식에 대한 부정 때문에 용납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이로 말미암아 압살롬이 차기 왕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적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허용한 결정적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2. 압살롬 반역 사건(15:1-19:8)

  그 후에 압살롬은 자기를 위해서 병거와 말들을 준비했으며, 전배 오십 명을 세웠다(1). '전배'라고 번역된 말('이쉬 라침')의 원래 뜻은 '달려가는 사람', 즉 '경주 자'란 뜻이다. 본문에서는 이 말이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다가면서 마차가 갈 길을 정비하고 왕을 경호하던 경호부대를 가리키고 있다. 압살롬이 병거와 말들과 오십 명의 경호부대를 갖춘 것은 반역을 위해 필요한 군사를 모으고, 다음 왕으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민심을 끌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왕상 1:5). 이제 압살롬은 서서히 다윗으로부터 민심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재판이 열리는 성문 길 곁에 서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왕에게 송사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왕이 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재판관이 되게 되면 이러한 일들을 공의롭게 재판해줄 것이라고 약속했다(2-4). 또한 압살롬은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절을 하려고 하면, 자신이 먼저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었다. 압살롬은 이러한 행동으로 백성들의 민심을 빼앗았다(5-6).

  압살롬은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4년 째 되던 해에 마침내 반역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다윗에게 가서 서원 제사를 드리기 위해 헤브론에 가겠다고 요청했다. 그의 반역적인 의도를 알지 못하는 다윗은 압살롬의 요청을 쾌히 허락했다. 압살롬은 미리 준비해 둔 정탐꾼을 모든 이스라엘 지역에 보내어 나팔 소리를 듣게되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세력이 있는 200명의 인사와 다윗의 모사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다. 이때에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200 명의 인사는 예루살렘 성의 고위 관리였을 것이다. 압살롬은 그들을 자기의 거사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7-8)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압살롬의 반란 기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헤브론으로 가게되었다. 압살롬은 그들을 자기편을 만들고, 또 반항하는 사람은 죽여 버릴 계획을 했을 것이다. 압살롬과 동행했던 아히도벨은 길로 사람이었는데, 길로는 유다 남쪽 산지에 있던 성으로(수 15:51),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히도벨은 지략이 뛰어나서 다윗의 모사로 일했으며(31), 그는 항상 하나님께 물어 일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의 지략은 실패가 없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반란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누구보다 먼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헤브론으로 갈 때에 아히도벨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위해 일을 하게 되었다(16:20-23; 17:1-3). 성경은 아히도벨이 다윗 왕을 배반한 이유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다윗이 범한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였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아비도벨이 손녀 사위인 우리아를 모살한 다윗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가 압살롬의 제의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급속도로 압살롬에게 유리해졌다. 이러한 원인은 아마도 압살롬의 매력적인 외모(14:25, 26)와, 그의 민신을 끌기 위한 치밀한 계획(1-6), 그리고 다윗 왕의 부정한 행위와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1)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한 일과(11장), 2) 암논의 범죄에 대한 우유부단한 조치(13:21), 그리고 3) 영토 확장 사업(8장)에 따른 국민에 대한 무관심과 과다한 세금 징수 등으로 다윗에 대해 마음이 떠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압살롬은 이러한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압살롬의 반역 소식은 즉시 다윗에게 전해졌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시도한 사실과, 이스라엘의 민심이 그에게 기울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신하들에게 예루살렘을 피하라고 지시했으며, 다윗의 신하들은 그 지시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에 후궁 10명을 남겨두어 그들로 궁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을 떠났다. 왕이 성에서 나갈 때에 모든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행렬은 벧메르학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13-17). '벧메르학'은 '먼 집', 또는 '먼 궁'이란 뜻을 가진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있던 다윗의 별궁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별궁이 기드론 시내를 넘기 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Keil, Lange, Pulpit).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기드론 시내를 넘기 전에 이 별궁에서 안전히 탈출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 잠시 이 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마침내 다윗은 피난 준지를 마치고 벧메르학을 떠났다. 그때에 모든 신복들은 다윗의 곁으로 지나갔으며, 모든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 그리고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600명이 왕의 앞에서 행진을 하고 있었다(18). 그렛과 블렛은 다윗 왕의 시위병이었다. 그렛은 왕명에 따라 중죄인을 처벌하던 사형집행 기관의 병사들이었으며, 블렛은 왕의 보발꾼이었다. 그리고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600명은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시절에 블레셋의 가드에서부터 다윗을 추종했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가드에서부터(삼상 27:2) 시글락(삼상  27:6; 30:1)과 헤브론(2:3)을 거쳐서 예루살렘에 이를 때까지(5:6) 초지일관하게 다윗 왕을 보필했다. 후에 다윗은 그들을 왕의 근위대로 임명하였으며, 그들이 지금 다윗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Wycliffe).

  그때에 다윗은 가드 사람 잇대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부탁했다(19-20). '잇대'는 '블레셋의 가드에서 망명해 온 용사였다. 그는 본국에서 큰 용맹을 떨쳤던 용사였기 때문에 다윗은 그를 자신의 군대 장관 중 한 사람으로(18:1-2) 세웠다. 잇대는 얼마 후에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반란군을 진압하는 지휘자가 되어 활약했다. 다윗은 잇대가 외국에서 망명해 온점을 참작해서 이스라엘 내란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에게 어렵게 자기를 따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잇대는 다윗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다윗은 그의 결심이 굳게 선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다윗은 그와 그의 군대들에게 자기보다 먼저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라고 지시했다(21-22). 다위을 따르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울면서 시내를 건너갔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건너간 후에 다윗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갔다. 시내를 건넌 후에 다윗의 일행은 광야 길을 행해 진군했다(23). 다윗이 광야 길로 갈 때에 대제사장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내려놓고 다윗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 대제사장이었던 아바아달 역시 그 곳에서 다윗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24).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다윗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자기를 따라오지 말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메고 가라고 지시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어약궤를 이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여호와의 주권에 맡기기를 원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볼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여호와의 주권을 따르기를 원했다. 다윗은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그의 아들인 아히마아스과 요나단을 데리고 성에 가서 광야 나룻터에서 자신의 기별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23-27).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다윗의 지시를 따라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긴 후에, 그의 아들들을 광야 나룻터에 머물게 하였다(28). 다윗은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 발로 울면서 피난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를 따라가는 모든 백성들 역시 자기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그 길을 따라갔다(29-30).   

  그때에 다윗은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르렀을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다윗을 맞으러 나왔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은 감람산 꼭대기를 가리킨다(30). 여기에서 '경배'라고 번역된 말은 '제사'보다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수께서도 생전에 이곳에서 기도하신 적이 있었다(마 26:30; 눅 21:37; 22:39). 다윗은 바로 전에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력하게 만들 사람을 다윗에게 보내주셨다. 그 사람은 바로 또 다른 다윗의 모사였던 후새였다. 다윗은 그를 통해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력화 시킬 계획을 세웠다. 다윗은 후새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의 편이 되라고 부탁했다. 다윗은 후새에게 압살롬의 편으로 위장하고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대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통해서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다윗은 그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요단 강을 건너지 않고, 나루터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의 친구 후새는 압살롬을 맞기 위해서 즉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의 같은 때에 압살롬의 행렬도 예루살렘 성으로 향했다(31-37).  


 
2-1. 시바의 책략(16:1-4)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났을 때에 므비보셋의 사환인 시바가 기다리고 있다가 다윗을 맞이했다. 여기에서 '마루턱'은 감람 산의 마루턱, 즉 감람 산 꼭대기를 의미한다. 시바는 안장을 얹은 나귀 두 필에 떡 200개와 건포도 100송이, 여름 과일 100개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기다리고 있었다(1). 시바는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해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였다(9:2,9-11). 그는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성품은 본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름 실과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완전히 익는 열매를 말한다(암 8:1,2). 이 실과는 야자수 열매로 추정되는데, 이는 열대 지방이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이 여행 시에 갈증을 해소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다윗은 시바에게 무슨 뜻으로 이것들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시바는 나귀는 다윗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소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이 마시게 하려고 가져온 것이라고 대답했다(2). 시바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피하는다윗을 대접한 것은 그가 압살롬의 반란이 실패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훗날 다윗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이러한 일을 행했을 것이다. 다윗은 시바에게 주인인 므비보셋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시바는 므비보셋이 다윗으로부터 다시 나라를 찾게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3). 그러나 이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사실 므비보셋은 절뚝발이로서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며, 왕이 되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시바는 주인을 거짓으로 고발하여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자신이 취하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시바의 계략에 속아서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고 말았다. 시바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자, 다윗왕에게 절을하고 자신이 왕에게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4).


 
2-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16:5-14)

  다윗 왕이 바후림에 도착했을 때에 사울의 집 족속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을 넘어서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과거 다윗이 옛 아내인 미갈을 발디엘로부터 데리고 올 때에 발디엘이 울면서 따라오다가 되돌아간 곳이었다(3 :16). 바후림에서 게라의 아들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왔다. 그는 그 곳에서 계속해서 다윗을 저주하면서 다윗과 그의 모든 신복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에 왕의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은 왕의 좌우에서 다윗을 모시고 있었다(5-6). 시므이는 다음과 같이 다윗을 저주하였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7-8)." 시므이는 다윗 왕이 과거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몰락의 책임을 다윗에게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근거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들을 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다. "비루한 자"라고 번역된 말('이쉬 하벨리야알')을 직역 하면 '벨리알의 사람'이란 뜻이다. 벨리알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 또는 "파괴나 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 또는 '파괴를 일 삼는 자식'이란 뜻이다(Wycliffe). 이러한 점에서 시므이의 욕설은 참기 힘든 독설이었다. "가거라! 가거라!"고 하는 말은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사라지라는 욕설이었다. 이러한 욕은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믿고 있던 히브리인에게는 신랄한 저주였다. 그러므로 시므이의 독설을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분노하여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9)!" 그러나 다윗 왕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했느냐?'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10)" 그리고 나서 다윗은 계속해서 아비새와 모든 신복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치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11-12)."스루야는 아비새의 어미였다(2 :18). 여기에서 '아들들'이란 복수가 사용된 것을보면 아비새 곁에는 그의 형 요압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압은 아마도 시므이률 단칼에 목 베어 버리자는 아비새의 의견을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아비새의 제의를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므로 다윗과 그 일행들은 시므이를 내버려두고 계속해서 피난길을 진행했다. 그러나 시므이는 계속해서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다윗과 그 일행을 저주하며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렸다(13). 왕과 그 일행은 길을 계속 가다가 크게 피곤해서 한 장소에서 휴식하고 있었다(14). 그러나 사무엘서 기자는 이 곳에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2-3. 예루살렘에 입성한 압살롬(16:15-23).

  마침내 압살롬과 그를 추정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으며, 이때에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하였다(15). 그때에 다윗의 친구 후새가 압살롬을 기다리다가 압살롬을 환영했다(2). 압살롬은 뜻밖에 다윗의 친구인 후새가 다윗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네가 어찌해서 이렇게 행했느냐?"고 말했다(16-17). 그러나 후새는 자신이 전에 압살롬의 부친을 섬겼으며, 이제는 그 아들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다(18-19). 후새는 이렇게 대답함으로 압살롬이 왕이 되는 것이 합법적인 것처럼 말했다. 압살롬은 후새의 말을 듣고 그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을 불러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아히도벨은 먼저 다윗이 궁에 남겨둔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말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이렇게 하면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20-21). 당시 근동에서는 왕위를 찬탈한 자가 전 왕의 후궁들과 동침하여 자신이 왕이 된 것을 공표하였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렇게 조언한 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 그는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 뿐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 간의 부자지정을 완전히 끊어놓기를 원했다. 2) 그리하여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모든 자들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려는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하는 경우에 그들이 반역자로 몰려 처형될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아히도벧은 압살롬의 추종자들이 안심하고 새 왕을 좇을 수 있도록 이러한 모사를 베풀었던 것이다. 3) 또한 이러한 모략은 다윗 왕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히도벨이 밧세바의 조부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는 밧세바를 강탈하고  우리아를 모살한 다윗 왕의 사악한 행위를 복수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아히도벨의 모략은 당시 세상의 관례에서 보면 정당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율법에 크게 벗어나는 처사였음이 분명하다. 1) 율법은 근친 상간을 금하고 있으며(레 18:7-8), 2)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왕을 거역하는 반역 죄였기 때문이다. 이에 사람들은 압살롬을 위해서 왕국 지붕에 장막을 치고 그 곳에 침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부친 다윗의 후궁들과 함께 동침했다(22). 이는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일찍이 다윗에게 "당신은 은밀하게 남의 아내를 취했지만, 하나님은 백주에 당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것과 같았다. 그는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 항상 정확한 모사를 베풀었다(23).
 

 2-4. 아히도벨의 모략이 거부됨(17:1-14)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게 한 후에 또 다른 모략을 베풀었다. 아히도벨은 군사 1만 1천명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 날 밤에 그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여 피곤하고 약해있을 때에 기습하겠다고 말했다.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쉴 틈도 주지말고 바로 추격하여 다윗을 처치하려고 했다. 이러한 아히도벧의 상황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은 매우 피곤한 몸으로 바후림 부근에서 쉬고 있었으며.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밤에 충분히 추격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군을 급파했었다면 다윗은 꼼짝 못하고 칼에 죽었을 것이다. 아히도벨은 백성들이 놀라서 달아날 때에  다윗만 죽이고 나머지 백성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다윗에게 있는 정예병은 600명 가량밖에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므로 압살롬의 정예병 11,000명이 기습하게 되면 그들은 모두 놀라서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아히도벨은 바로 이때에 다윗만 죽이면 모든 민심을 압살롬에게 돌아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들은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모두 다 그 계책에 동의했다(1-4).

  그러나 압살롬이 아렉 사람 후새의 견해도 듣기를 원하여 그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압살롬은 후새가 오자 아히도벨의 모략을 말하고 그의 생각이 어떠한지 물었다. 후새는 그 말을 듣고 아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획이 실행되면 다윗이 반란군에게 죽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새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그 동안 아히도벨의 모략이 항상 옳았지만 이번만큼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압살롬을 설득하기 위해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다윗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뛰어난 용사들이며 지금 새끼를 뺏긴 곰처럼 분노해 있다. 후새가 다윗과 그 일행을 '새끼를 빼앗긴 곰' 에 비유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곰은 팔레스타인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시리아의 갈색 곰을 가리킨다. 이 곰은 매우 사나운 것으로 이름이 나있다(잠 17:12; 호13:8). 후새는 다윗과 그 일행을 사나운 시리아의 갈색 곰에 비유함으로, 심히 약화된 다윗의 실제 전력을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2) 다윗은 병법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과 함께 자지 않고 굴이나 은신처에 숨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다윗은 그 동안에 이러한 방법으로 수없이 적들을 따돌린 경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후새의 주장은 압살롬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3) 만일 이 싸움에서 압살롬의 군사 몇 사람이 먼저 죽으면 압살롬 군대가 패했다는 소문이 나게 되어 전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5-10).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나서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압살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후새는 모든 군사들을 모아서 다윗의 군대와 전면전을 펴서 다윗과 그를 따른 모든 군사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후새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지원병을 모집 할 것을 제안했다. 후새는 다윗 왕이 전투 태세를 갖출 준비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압살롬에게 자원병을 모집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이 자기 힘을 과시해 볼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끌었다. 후새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진두 지휘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압살롬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계략이었다. 반란의 주모자인 압살롬이 전쟁에 나가서 죽거나 포로가 되면 반란은 끝나기 때문에 후새는 이러한 계략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영웅 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군대를 친히 진두 지휘하는 일은 새 통치자가 된 압살롬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다윗의 군사들을 덮어서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후새는 아침에 이슬이 온 땅을 덮듯이 무수한 자원병을 앞세워 다윗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엄청난 다수로써 소수인 다윗의 세력을 몰아붙이는 인해 전술을 사용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후새의 말은 압살롬의 마음을 우쭐하게 만들었다. 후새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상황을 낙관적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압살롬과 그의 신하들은 결국 후새의 모략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후새의 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징계할지라도, 그의 생명과 나라는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7:14-16; 12:9-13).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여 다윗을 구원해 주셨던 것이다. 사무엘서 기자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거부된 것이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음 것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11-14).


 
2-5. 다윗이 후새의 기별을 듣고 요단 강을 건넘(15-22)

  후새는 즉시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가서 아히도벨과 자신이 베푼 모략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통해서 다윗에게 요단 강 나루터에 머물지 말고 즉시 강을 건너도록 전하라고 말했다. 이때에 사독과 아비아달의 두 아들, 즉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사람들이 볼 것을 두려워하여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있었다. 에느로겔은 `방랑자의 샘', 또는 `풍성한 샘' 이라는 뜻이다. 이 샘은 예루살렘 남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었는데, 수맥이 골짜기의 지하수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우기에는 지하수가 골짜기로 흘러넘쳤다. 따라서 이 곳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안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여자 종을 시켜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소식을 전달하게 했다. 여자 종은 물을 걸러 온 것처럼 위장해서 이 곳에 의심받지 않고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압살롬이 풀어놓은 한 첩자가 그 여인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압살롬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 수상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가 그는 마침내 수상한 여인이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보고 압살롬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이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빨리 달려가서 바후림에 있는 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집의 뜰에 있던 우물에 숨어 있었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을 넘어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었다. 그 집 여인은 사람들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찾지 못하도록 우물 뚜껑을 갖다가 우물을 덮고 그 위에 찧은 곡식을 널어놓았다. 그 뒤에 바로 첩자의 보고를 받은 압살롬의 군사들이 그 집을 찾아왓다. 그 군사들은 집 주인에게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어디로 갔느냐? 고 물었다. 그 집 주인은 그들이 요단 강을 건너 피신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압살롬의 군사들은 그들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수색하다가 결국에는 그들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압살롬의 군사들이 돌아간 후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에게 달려가서 후새가 전한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다. 다윗은 후새가 전한 소식을 듣고 즉시 일어나서 일행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이 되기 전에 다윗과 그 일행은 모두 다 요단 강을 건널 수 있었다(15-22).


 
2-6. 아히도벨이 자살함(23-29)

  아헤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압살롬이 결국 전쟁에서 패할 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의 군사들에게 패배하여 수치스럽게 죽는 길보다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그는 나귀에 안장을 얹고 고향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기 집을 정리 한 후에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으며, 조상의 묘에 장사되었다. 그 후에 다윗의 군대는 마하나임에 이르렀고, 압살롬도 모든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단 강을 건너게 되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자원병을 모집하여 인해 진술로 밀어붙이자는 후새의 제안을 따랐다. 따라서 압살롬이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다윗은 모든 반격의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압살롬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그가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첫째로 다윗 진영은 요새화 된 뒤에 마하나임에 안전한 본부를 두었으나, 압살롬 진영은 무방비 상태의 들에 진을 치고 있었다. 둘째로 다윗 왕이 마하나임 성읍에 머물면서 군사를 지휘한 반면에, 압살롬은 직접 전쟁에 나감으로 다윗보다 훨씬 더 위험이 컸다. 이것이 바로 후새가 의도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압살롬은 요압 대신에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삼았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의 아들이었다.

  아마사는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의 사촌이었으며(대상 2:13-17), 압살롬과는 고종 사촌간이었다. 아마사는 후에 다윗의 군장이 되었으나 기회주의자인 요압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20:10). 아마사의 아버지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는 (대상 2:17)에서 '이스마엘 사람 예델' 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예델'은 '이드라'의 축약형일 것이다. (대상 2:17)을 보면 그는 이스마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는 외국인이 아닌 경우에는 그 사람의 국적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드라는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이스라엘 여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인으로 국적을 바꾼 외국인이었다. 이두라는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아마사를 낳게 되었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모친인 스루야의 동생이었다. 아비갈은 일명 아비가일로도 불리웠는데 그는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와 자매지간이었다(대상 2:16). 그러나 나하스가 누구인지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비갈은 스루야와는 자매지간이었으나 다윗과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군사들과 압살롬은 길르앗 땅에 진을 치게 되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사람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바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가 다윗을 찾아왔다. 소비는 암몬의 왕이었던 나하스의 아들이며 하눈의 동생이었다(10:1). 그가 다윗에게 와서 도움을  준 것을 보면 자기의 형 하눈과는 달리 부친 나하스와 같이 다윗 왕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Ewald). 마길은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보호해 준 사람이었다(9:4). 아마도 그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사랑을 베푼 것을 기억하고 다윗을 도우려 했을 것이다(Pulpit). 로글림은 길르앗의 한 성읍이었는데, 바실래는 이 성에 살던 큰 부자였다(19:32). 그가  다윗을 도우러 온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는 다윗 왕의 훌륭한 통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윗을 도우려고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윗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은 모두 다윗 왕의 인격이나 통치력에 감복하고 다윗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다윗이 전쟁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 담요와 침구-음식을 하는 가마솥(대야)-질그릇-밀과 보리와 밀가루-볽은 곡식-콩과 팥-볽은 녹두-꿀과 버터-양과 치즈. 그들은 다윗과 그들의 일행이 피난길에서 매우 시장하고 피곤하며 목마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음식들을 가져왔다. 황급히 피난길에 나서기 위해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길을 떠난 다윗과 그 일행에게  이러한 풍성한 구호물이 제공된 것은. 다윗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다(23-29).


 
2-7. 압살롬의 패배(18:1-18)

  다윗은 자신을 따르던 용사들과 그 곳에서 지원한 병사들을 정비하고 사열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 이 당시에 다윗군의 병력은 그렛 군사들과 블렛 군사들, 가드에서 온 육백 용사들, 그리고 기타 병력을 합해서(15:18) 약 4천명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이 병사들은 좀더 세분하여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고 그들에게 그 병력을 맡겼다. 이때에 병력의 1/3은 요압이 , 그리고 1/3은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그리고 나머지 1/3은 가드 사람 잇대가 통솔하게 하였다. 이 때에 다윗은 선두에 서서 그 군대를 지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백성들이 다윗의 출전을 만류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 첫째로 부자지간의 전쟁이 보기에 좋지 않았고, 2) 둘째로 부친인 다윗이 아들인 압살롬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3) 셋째로 다윗이 전사하는 경우 사태는 절망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4) 그리고 숫자 면에서 압살롬의 군대에 비해 월등히 적은 다윗 군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이 성에는 보급품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17:27-29), 유사시에 이를 적절하게 공급해 줄 지도자도 필요했다. 다윗은 백성들의 만류가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뒤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1-3). 마침내 다윗이 성 문 곁에 서 있는 가운데 군사들은 백 명씩, 그리고 천 명씩 무리를 지어 행진을 했다. 이때에 다윗은 군대 장관인 요압와, 아비새와, 잇대를 불러 소년 압살롬을 관대하게 대해달라고 부탁했다(4-5). 마침내 이스라엘과 압살롬의 군사들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언급된 에브라임 수풀은 요단 강 서편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과 압살롬의 군사들이 싸우고 있는 곳은 요단 강의 동쪽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압살롬이 이끄는 군사들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크게 패했다. 이 날에는 전투로 죽은 사람들보다 수풀 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요단 동편의 에브라임 수풀에는 좁은 협곡이나, 가파른 벼랑, 또는 늪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이 이를 이용한 효율적인 공격에 뿔뿔이 흩어졌던 압살롬의 군사들은 이러한 곳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전쟁으로 압살롬의 군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했으며 2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잃고 말았다(6-8).


 
2-8. 압살롬의 죽음(9-18)

  압살롬은 전쟁에서 패한 것을 보고 다윗의 부하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그만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그의 몸이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다(9). 압살롬은 머리숱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14:26).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털로 인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자랑거리를 멸망의 도구로 삼으시는 경우가 많다. 이 광경을 본 한 병사는 즉시 요압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요압은 그 군사에게 "왜 즉시 압살롬의 죽이지 않았느냐?" 고 다그쳤다. 요압은 만일 그가 압살롬을 죽였다면 그에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 열 개와 띠 하나는 전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주는 포상물이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은 열 개'는 화폐라기 보다는 군복에 매다는 장식품이나 소지품이었을 것이다(눅 15:8). 또한  '띠'('하고라') 역시 허리에 두르는 군장으로, 화려한 수를 놓은 장식품으로 보인다(왕상 2:5; 사 3:24; 22:21). 이러한 포상물은 군인의 명예를 세워주는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라는 부탁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은 일천 개를 준다고 해도 자신은 압살롬을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10-13). 그러나 요압은 아무리 다윗의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적장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인 압살롬의 제거하여 모든 반란의 화근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끝이 뾰적한 막대기 셋을 가지고 달려가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이를 보고 요압의 병기를 맡았던 열 명의 군사들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죽이고 말았다(14-15). 요압은 반란 군의 수장이 죽은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더 이상 이스라엘 군사들을 추격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무리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있는 큰 구멍에 던졌다. 그리고 그 위에 큰 돌 무더기를 쌓아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16-17). 여기에 언급된 구멍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덩이나, 또는 폐쇄된 우물이었을 것이다(Wycliffe). 팔레스타인에는 물이 귀해서 곳곳에 우물을 파던 곳이 많았다(창 26:17-22). 요압이 압살롬의 시체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부모의 말을 거역한 패륜아를 돌로 치라는 율법의 조항을 따른 것이었다(신 21:21). 또한 이 돌무더기는 아간의 경우처럼 반역자의 수치를 나타내기도 했다(수 7:26; 8:29). 본래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14:27).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이름을 이을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자, 비석을 세워서 자기의 명예를 후대에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으로 세워진 비석은 정반대로 그의 수치를 전하는 표시가 되고 말았다. '왕의 골짜기'는 (창 14:17)에 나오는 '사웨 골짜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물리친 후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던 골짜기였다. 요세푸스는 왕의 골짜기가 예루살렘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Ant. Vii,3). 이러한 요세푸스의 주장을 보면 왕의 골짜기가 기드론 골짜기의 한 부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Keil, Lange).


 
2-9.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다윗(19-33)

  압살롬이 죽은 것을 본 대제사장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요압에게 자신이 즉시 다윗에게 달려가서 승전 소식을 전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요압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의 죽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를 만류했다. 요압은 아히마아스 대신에 구스 사람을 보내어 대신 그 소식을 전하게 했다(19-21). 본문에 언급된 `구스 사람'은 에디오피아인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던 다윗 왕의 노예였을 것이다. 요압이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다윗에게 알리는 일을 구스인에게 맡긴 것은 그가 외국인으로 다윗 왕의 노예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압살롬의 죽음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Rust). 또한 요압은 구스인을 전령으로 보냄으로 다윗이 전령을 보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예감하게 하여 다윗 왕의 충격을 완화시키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자기 입으로 이번 승전 소식을 다윗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는 요압에게 자기도 가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요압이 마지못해서 그 일을 허락하게 되자,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빨리 달려서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이 있는 성에 도착했다(22-23). 여기에 언급된 "들길"은 `요단 계곡의 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평평한 평지 길이었기 때문에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구스인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마하나임으로 가는 직선거리로 달려갔던 것 같다. 이 길은 비록 거리 상으로는 짧았지만,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는 험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아히마아스가 구스인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먼저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에 다윗은 문 사이에 앉아서 요압이 보내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문 사이는 성의 외문과 내문 사이를 의미한다. 이곳은 파수꾼이 있던 성문루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다윗 왕은 하루 종일 이 곳에 앉아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쟁터에서 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23-24).

  그 때에 성문루에 서서 파수를 보던 파수꾼이 성을 향해서 달려오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파수꾼은 즉시 이 일을 다윗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다윗은 달려오는 사람이 한 사람이면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일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에는 많은 패잔병들이 달려와서 보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인 경우에는 요압이 보낸 전령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전령을 아히마아스의 뛰에 오는 전령도 발견하고 다윗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다윗은 그 사람 역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이라고 말했다. 파수꾼은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사독의 아들인 아히마아스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다윗은 그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오고 있다고 말했다. 다윗은 아히마아스와 같은 충성된 사람이 자기 군사들을 버리고 홀로 도망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히마아스는 성에 도착해서 다윗 앞에 나와서 절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다윗 왕에게  다윗의 군사들의 승전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다윗은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모르는 척했다. 바로 그때에 구스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또 다시 승전 소식을 전했다. 다윗은 또 다시 그에게 압살롬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구스 사람은 다윗에게 압살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심히 마음이 아팠다. 그러므로 그는 성문루에 올라가서 울기 시작했다. 다윗은 차라리 압살롬을 대신해서 자신이 죽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울며 애통하였다(25-33). 이러한 다윗의 절규는 다음과 갈은 이중적인 슬픔이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첫째로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본능적인 슬픔이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불러온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픔을 크게 느꼈다. 다윗 왕은 압살롬의 죽음이 자기의 죄 때문임을 알고서 흐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이미  두 아들을 잃고 말았다(12:15-19; 13:30-39). 그러나 이제 그는 또 다시 압살롬마저 잃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뼈아픈 과거의 죄가 생각이 나서 통한의 울음을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절규는 압살롬을 대항하여 싸웠던 군사들에게는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동이 되었다.


 
2-10.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19:1-8)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인해 슬퍼한다는 소식은 곧 승전하고 돌아오는 요압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왕이 자기 아들의 죽음을 인해 슬퍼한다는 소식이 모든 군사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마땅히 기뻐해야 할 그 날의 승리는 오히려 백성들에게 슬픔을 주고 말았다. 그러므로 당당히 개선 환영 식 행진에 맞추어 들어가야 할 요압과 다윗의 군사들은 마치 패잔병처럼 슬며시 성에 들어가고 말았다(1-3). 이때에 다윗은 승전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하고 있었다(4). 이러한 다윗의 처절한 애곡은 단순히 부친으로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으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왕이 목숨을 걸고 싸워 승전한 군사들을 환영하지 않고 압살롬을 인해 애통해 하는 것을 본 요압은 다윗에게 가서 불만이 섞인 조언을 하였다. 요압은 다윗 왕이 오늘 생명을 걸고 나가 싸워서 왕과 그 가족을 구원한 신하들을 부끄럽게 했다고 말했다. 요압은 이러한 다윗 왕의 행동은 왕이 반역자를 사랑하고, 왕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들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처사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요압은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마치 압살롬이 승리를 하고, 왕의 모든 신하들이 죽기를 원했던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요압은 다윗에게 승전하고 돌아온 신하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만일 다윗이 계속해서 슬퍼하고 신하들을 격려하지 않으면, 오늘 밤 안으로 모든 신하들이 왕을 떠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윗에게 치명적인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5-7). 요압의 충언을 들은 다윗은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고 일어나서 성문에 나가 앉아있었다. 당시 사회에서 성문은 매매, 행정, 집회 등이 열리는 장소였다(룻 4:1-2, 삼상 9:18, 욥 29:7, 암 5:10,12). 또한 성문은 왕이 백성들과 만나는 장소였으며, 재판하는 곳이었다(15:2). 따라서 다윗 왕이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왕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에서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을 치하하고 격려하며,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요압의 권고가 거칠고 무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요압의 권면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결단이 있기까지에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위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시 40:17; 56:13). 왕이 성문에 앉았다는 소식을 들은 모든 백성들은 함께 왕의 앞으로 나아오게 되었다. 이 말은 왕 앞에서 군대의 개선 행진이 있었으며, 또한 승리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왕과 백성들 간에 즐거운 대면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이 일로 인해 압살롬의 반역에 참가했던 무리들은 전의를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그들은 더 이상 저항할 명분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 집으로 피신했다. 이로 인해 반역으로 위기를 맞았던 나라는 다시 평화를 찾게되었다.


3. 다윗의 복귀(19:9-43)

 3-1. 다윗 왕의 복권 문제가 거론됨(9-14)

  압살롬의 죽음을 인해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시 다윗을 왕의 복권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게 되었다. 그들은 압살롬이 죽은 후에 다시 다윗의 공적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비록 잠시 다윗의 부정과 압살롬의 수려함에 미혹되긴 하였지만, 모든 원수들과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다윗의 공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압살롬이 죽은 상황에서 다윗 왕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자신의 복권 문제를 의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반역에 적극 가담했던 유다 지파만은 이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다윗의 보복을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복권 문제를 거론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다윗은 왕의 복권 문제를 담당할 고문으로 있던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파송했다. 그리고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 왕의 복원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이 때에 형제 지파인 유다 지파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했다.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써 보복을 두려워하는 유다 지파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다윗은 대제사장을 통해서 자기의 형제이며 친척인 유다 지파가 자신의 복권 문제에 앞장 서 주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특히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압장 섰던 군대 장관 아마사를 요압 대신에 군대 장관으로 삼겠다고 맹세했다. 이러한 다윗의 맹세는 반역에 가담한 유다 지파에 대한 보복이 없으며, 그들을 중요한 자리에 중용하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포용정책은 주춤거리던 유다 지파의 마음을 다시 다윗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9-14).


 
3-2. 다윗을 영접하는 시므이와 므비보셋(15-30)

  유다 지파의 민심을 되돌림으로 마침내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널 때에 수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서 길갈에 와 있었다. 길갈은 여로 곳이 있었다. 즉 엘리사의 길갈(왕하 2:1-4)과 갈릴리의 길갈(수 12:23),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던 길갈(수 15:7), 그리고 에발 산 근처에 있던 길갈이 있었다(신 11:30). 여기에 언급된 길갈은 여리고 근처, 즉 요단강 가에 잇던 길갈을 말한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넌 후에 진을 치고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이었다(수 4:19-20). 한편 이곳은 바로 요단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유다 장로들이 다윗 왕을 맞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이때에 다윗 왕을 저주했던 베냐민 사람 시므이와 사울의 사환이었던 시바가 급히 나와서 다윗 왕을 맞이했다. 시므이는 자신이 다윗을 저주했던 일을 용서받으려고 급히 서둘러 나왔으며, 시바는 다윗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그 곳에 나와 있엇다. 베냐민 사람 시므이는 과거에 자신이 다윗을 저주했던 일을 뉘우치면서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때에 군대장관 아비새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저주한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의 말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이 때에 다윗의 피난길에 나타나지 않았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도 그 곳에 나와서 다윗을 영접했다. 그는 왕이 피난을 슬퍼하여, 왕이 피난을 떠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다듬지 않고 수염을 깍지 않았고 또 옷을 빨지 않았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네가 어찌 나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이때에 므비보셋은 자신은 절뚝발이이기 때문에 시바를 시켜서 나귀에 안정을 얹고 다윗 왕과 함께 가려고 했지만, 자기 종인 시바가 자기를 속여 그 나귀에 음식을 싣고 다윗에게 가서, 거짓으로 자기를 참소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다윗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자기 부친의 집이 벌써 사라져야 했지만, 다윗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늘날과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 변명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이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울의 모든 밭을 시바와 나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그 모든 밭을 시바에게 주라고 요청했다. 그는 재산으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이 자기의 종과, 다윗 왕과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아무런 재산이 없어도 다윗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3-3. 바실래의 요청과 복권 문제로 인해 갈등(31-43)

  이때에 다윗 왕이 어려울 때에 왕을 도왔던 길르앗 사람 바실래가 왕이 요단 강을 건너는 일을 돕기 위해서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요단 강에 도착했다. 그는 나이가 80세나 된 노인으로 매우 부자였기 때문에 다윗이 마하나님에 있을 때에 다윗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다윗은 그의 공로를 갚기 위해 바실래에게 예루살렘 궁전으로 같이 가지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이기 때문에 다윗을 따라 가 봐야 폐만 끼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요청을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자신은 죽어서 자기 조상의 묘에 묻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대신 자기의 아들인 젊은 김함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김함'은 (왕상 2:7)을 통해 볼 때에 다윗 왕을 전송하기 위해 부친 바실래와 함께 내려온 바실래의 아들로 보인다. 바실래는 다윗 왕의 호의에 감사하여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젊은 `김함'을 다윗 왕에게 부탁함으로써, 다윗의 배려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윗 왕은 이러한 바실래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김함을 궁으로 데리고 갈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의 요청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윗 왕은 다른 왕자들에게 하듯이, 바실래의 호의(17:27-20)를 생각하여, 김함에게도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토지를 선사하였던 것 같다. (렘 41:17)을 보면, 베들레헴 근처에 `게롯김함', 곧 '김함의 숙소'가 있었다. 이곳은 애굽으로 가는 여행객과 대상들이 묵고 가는 여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후에 이 여관에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눅2:7; Stanley, Jewish church, 2.201).

  이외에도 다윗 왕은 임종시에 솔로몬에게 김함의 안전을 특별히 부탁함으로, 바실래의 호의에 대해 보답했다(왕상 2:7). 다윗 왕이 김함과 함께 갈갈에 도착했을 때에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의 반이 왕을 따르고 있었다(31-40). 이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왕에게 어찌 유다 지파가 우리 왕을 도적질했느냐 ?고 항의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다윗의 북권 문제를 의논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다 지파가 마땅히 그 일에 대한 결정을 기다렸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온 일이 옳지 않다고 항의했다.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의 불평은 유다 지파와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지파는 사사 시대 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했던 지파였다. 그들은 다윗 시대에 나라의 주도권이 유다 지파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삿 8:1;12:1). 또한 이들이 유다 지파인 다윗 왕 앞에서 유다 지파를 정면으로 불평한 것을 보면, 유다 지파를 특별히 배려하는(11-15), 다윗 왕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의 불평은 수그러들지 아니하고, 곧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20:1,2). 그러나 유다 지파 사람들은 다윗 왕이 자신의 형제이며 친척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왕의 복권 문제에 대해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유다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을 인해 뇌물이나 특혜를 받은 일이 없으므로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시비 걸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스라엘에 대해 1/10의 자격이 있으므로, 마땅히 유다 지파가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에 자신들과 의논했어야 옳다고 거듭해서 항의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는 문제로 인해 이스라엘 지파와 유다 지파 사람들이 크게 다투었다. 그러나 그 날에 유다 지파 사람들의 주장이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의 주장보다 더 강경했다. `강경했다'는 말(`카솨')은 `완강하다', `거칠다'. `격렬하다'. `날카롭다',`쓰리다', `고집이 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창 49:7; 출 13:15). 따라서 이 말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감정을 섞어 격렬하게 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세바의 반역과 진압(20장)

  다윗 왕을 궁으로 모셔오는 일로 인해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가 다투던 길갈에는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고 하는 난류가 있었다. '난류'('이쉬 벨리야알')라는 말은 '무익한 사람', '파괴적인 사람'이란 뜻을 가진 말로서(16:7), '비류'(삿 19:22; 삼상 10:27; 30:22; 왕상 21:10; 대하 13:7),  또는 '불량자'(삼상 2:12; 25:17, 25; 잠 6:12; 16:27)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이는 부도덕하고 사악한 자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익하고 쓸모 없는 자라는 뜻이다(고후 6:15). 세바는 베냐민 지파의 족장급 인물로서, 사울가를 지지하는 과격한 선동가였다(Lange). 그는 나팔을 불면서 우리가 이새의 아들 다윗과 함께 할 업이 없다고 소리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선동했다(1). 그가 불었던 나팔('쇼파르')은 수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로서, 이 나팔은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임박한 재앙을 경고하거나 성문을 닫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E. Werner).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세바가 나팔을 분 것은 다윗 왕의 파문과, 그에 대한 반란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다윗으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그들의 토지나 기업이 다윗의 간섭을 받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좆기를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윗 왕에게 등을 돌려 그의 통치를 거절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반역 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세바의 선동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좆는 일을 중단하고 세바를 좆아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끝까지 남아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동행했다(2). 다윗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 전에 남겨 두었던 후궁 10명을 잡아서 별실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을 것만 주고 그들과 동침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평생을 생과부로 지내야만 했다(3).이들은 압살롬이 동침했던 후궁이었다. 다윗이 이들을 별실에 격리시킨 것은 수치를 당한 여인에 관한 율법 조항(신 9:1-4)을 따른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4). 특히 이들은 아들과 동침하였기 때문에 근친상간에 해당되었으므로(레 18:6-8),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다윗 왕은 그들을 성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이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거나 내쫓는 가혹한 형벌은 하지 않았다.

  다윗은 세바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장관 아마사에게 3일 내로 유다 사람들을 소집하고 예루살렘에 와서 있으라고 명령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세바의 난을 평정한 기회를 주려고 했다.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 요압 앞에서 그의 권위를 세워주고, 그를 군대 장관으로 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아마사는 다윗의 명령을 듣고 떠났지만 정한 기한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지체된 것은 아마도 그의 무능력함과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그에 대해 유다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아마사가 지체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비새를 불러서 왕과 궁정을 지키는 정예병을 이끌고 세바를 추격하도록 지시했다. 다윗은 세바의 추격이 더 이상 지체하되면 그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체포하는 일이  어려워 질 것을 염려했다. 이에 요압과 아비새는 황실의 정예병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 세바를 추격하기 시작했다(4-7). 그들이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렀을 때에 유다 지파를 소집하러 갔던 아마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에 요압은 아마사에게 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아마사에게 나아갔다. 아마사는 요압의 허리에서 칼이 빠진 것을 보고 그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압은 숨겨두었던 단검을 몰래 꺼내서 아마사에게 인사하는 척 하면서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의 시체가 길에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군사들이 길을 가다가 멈추어 섰다. 이를 본 군사 중 하나가 아마사의 시체를 큰길에서 옮겨서 옷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요압과 아비새는 그 군사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베그리의 아들 세바를 추격했다(8-13).

  요압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그들의 군사들을 통합해서 함께 세바를 추격했다. 이때에 요압이 거쳐간 성은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의 모든 지역이었다. 요압이 이끈 군사들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가 있는 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 성을 향해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그 성벽을 쳐서 헐어버리려고 했다. 그 때에 그 성안에 사는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요압에게 어찌해서 이유도 없이 화평하고 충성스러운 성을 공격하느냐?고 항의했다. 요압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기업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다윗 왕을 대적하기 때문에 성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요압은 만일 세바만 내어주면 즉시 이 성을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녀는 세바의 머리를 베어서 성밖으로 내어 던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여인은 성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설득하여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이 있는 곳으로 내던졌다. 요압은 세바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팔을 불어 추격 작접이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이로 인해 모든 백성들은 세바의 추격 작전을 끝내고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다윗 왕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14-22). 이와 같이 해서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왕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사무엘서 기자는 큰 단락을 마무리 할 때에 하던 대로(8:15-18), "다윗 용사들의 명단"으로 이 단락을 끝내고 있다(20:23-26). 여기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군대장관-요압, 2) 그렛과 블렛의 장관-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3) 감역관-아도니람, 4) 사관-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 5) 서기관-스와, 6) 제사장-사독과 아비아달, 7) 다윗의 대신-야일사람 이라. 이러한점에서 보면 (삼하 9-20)장은 다윗의 약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은혜의 언약에 따라 그의 왕권이 보존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다윗은 완벽한 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었다.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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