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50-2과)

다니엘이 본 환상과 계시 (7-12장)


B. 환상과 계시(7-12장)

  다니엘서의 후반부(7-12장)에는 다니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4개의 환상과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1-6장)에는 주어가 3인칭으로 되어있었지만 7장부터는 주어가 1인칭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이 환상들이 다니엘 자신이 직접 받은 환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첫 번째(7장), 두 번째(8장)그리고 세 번째 환상(9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지막 네 번째 환상(10-12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는 바사 제국의 통치 때부터 마지막때까지의 이스라엘과 세계의 역사에 대한 계시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다니엘서 11장의 내용을 생각해 볼 것이다.

다니엘이 본 환상과 계시(7-12장)

첫째 환상
- 네 짐승 -

둘째 환상
-수양과 염소-

셋째 환상
- 70이레 -

넷째 환상
- 왕들의 전쟁 -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두 번째(메대-바사)-세 번째 왕국(헬라) 지배하의 이스라엘 역사"(11:1-35)

  다니엘서 11장에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의 여러 왕조들 그리고 여타 국가들의 흥망 성쇠 및 투쟁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 민족 핍박과 그의 비참한 최후가 간략하게 예언되어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종말에 있을 영적 이스라엘된 성도들에게 일어날 일에 관한 예언이기도 하다. 특별히 4절까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헬라 제국의 분열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가. 알렉산더 제국의 분리 이전까지의 역사(2-4)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들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충동하여 헬라 왕국을 칠 것이며(2),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3).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라(4)."

 천상 사자는 다니엘에게 이제부터 참된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다니엘의 네 번째 계시 내용이 시작되고 있다. 먼저 천상의 사자는 바사에서 세 왕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 왕'은 고레스 이후에 등장할 1) 캄비세스(Cambyses, B.C. 529-522), 2) 스멜디스(Smerdis, B.C. 522-521), 그리고 3) 다리오 히스타스피스(Darius Hystaspis, B.C. 521-486)를 가리킨다. 사자는 그 후에 넷째 왕이 일어날 것이며, 그 왕은 이전의 세 왕보다 크게 부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네 번째 왕'은 에스더서에서 '아하수에로'(Ahasuerus)로 언급된 크세르크세스(Xerxes, B.C. 486-465)를 가리킨다. 그 왕은 부요함으로 강성해진 후에 모든 사람들을 부추겨서 헬라국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는 왕으로 즉위한 후에 부왕 다리오가 실패한 헬라 정복 사업을 물려받아 막강한 경제적,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마게도냐를 침공했다. 그의 이러한 정복 사역은 초기에는 성공한 듯 보였지만, 살라미스(Salamis) 전투에서 알렉산더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에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은 플라타이아(Plataea) 전투를 끝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사자는 그 후에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3). 여기에 언급된 '한 능력있는 왕'은 우리가 잘 아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을 말한다. 그러나 그 왕은 한창 강성할 때에 그 나라가 갈라져서 사방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4절은 알렉산더 사후에 헬라 제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3가지로 요약해서 말해주고 있다.

1) 그 나라는 알렉산더의 후손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바사의 공주 록산나(Roxana)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4세는 카산더에 의해 살해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형제로 정신 이상자였던 필립 아르히다우스(Phillip Arrhidaeus) 역시 암살되었다. 그러므로 아렉산더가 죽은 후에 알렉산더의 혈통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2) 알렉산더가 주장하던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를 자신이 차지하겠다는 알렉산더의 교만과 정복 야욕은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허망하게 사라져버리게 되고 말았다.
3) 다른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의 부하였던 4명의 장군이 차지하고 말았다.

 나. 에피파네스까지의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시드 왕조(5-20)

  5-20절은 헬라 제국에서 분열된 네 왕조 중에서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남방 왕조(톨레미 왕조)와 북방 왕조(셀류쿠스 왕조) 사이에있을 전쟁과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B.C. 250-190년 에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남방의 왕들은 강할 것이나 그 군주들 중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의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5).." 

  알렉산더 사후에 헬라 제국을 차지한 네 나라 중에서 남방의 왕들이 특히 강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군주들 중에 하나는 모든 왕들보다 더 강하여 권세를 큰 권세를 갖게될 것이다(5). 여기에 나오는 '남방의 왕'은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던 톨레미 1세(Ptolemy I)를 말한다.  그리고 '그가 강하다'는 말은 톨레미 왕조가 B.C. 3C 내내 팔레스틴에 대한 치리권을 가졌던 것을 말한다. 또 '그 군들 중의 하나'는 분열된 네 왕조 중의 하나인 시리아 왕국의 초대 왕 셀류쿠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를 가리킨다. 그는 원래 톨레미 왕조보다 미약한 세력으로 출발했지만, 계속된 정복 사역으로 말미암아 B.C. 200년경에는 톨레미 왕조가 차지했던 팔레스틴을 정복하고 인도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단합하리니 곧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가서 화친하리라 그러나 그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그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 때에 도와 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6)." 

  이집트에서 프톨레미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필라델푸스가 왕이 되어(주전 285년) 약 40년간을 다스렸다(246년까지). 그리고 이 시기에 시리아에서는 왕이 두 번 교체되었다. 셀류커스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안디오쿠스 1세가 20년간을 통치했고, 그 뒤를 이어 셀류커스 1세의 손자인 테오스(안티오커스 2세)가 약 16년을 다스렸다. 시리아의 왕 테오스(안키오커스 2세)는 처음에 필라델푸스(프톨레미 2세)와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전 250년에 이르러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 동맹은 필라델푸스가 자기 딸인 베레니스를 테오스에게 줌으로서 더욱 공고해졌다. 처음에 이들의 정략 결혼은 성곡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에 데오스의 전처인 라오디스(Laodice)가 베레네스와 그녀의 아이를 살해하고 결국에는 안티오쿠스 2세마저 독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두 나라의 정략 결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에 실권을 장악한 라오디스는 베레네스의 동조자들을 제거하고 자기 아들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녀가 세운 왕은 셀류쿠스 2세인 셀류쿠스 칼리니쿠스였다.

  "그러나 그 공주의 본 족속에게서 난 자 중의 한 사람이 왕위를 이어 권세를 받아 북방 왕의 군대를 치러 와서 그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쳐서 이기고(7), 그 신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과 은과 금의 아름다운 그릇들은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8). 북방 왕이 남방 왕의 왕국으로 쳐들어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가리라(9).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이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10).."

  그러나 베레니스의 형제인 유게테스(프톨레미 3세; 주전 246-221년)가 그의 아버지(프톨레미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에, 그는 누이 베레니스를 죽이고 결혼을 파기한 원수를 갚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시리아를 공격하여 자기 누이를 죽인 라오디스를 죽이고 북방 왕(시리아 군)을 정복했으며 엄청난 전리품을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그가 탈취한 전리품은 금 4,000달란트와 2500여개의 우상들이었다. 이 전리품은 바사의 캄비세스가 B.C. 524년에 애굽에서 탈취해갔던 것이었다. 특별히 우상(신상)의 탈취는 고대에 있어 정복자들의 일반적인 관습으로 자기 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의도에 기인한 것이다. 그 후 B.C. 240년에 톨레미 3세는 셀류쿠스 2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잠시 평화롭게 지냈다. 후에 칼리니커스(북방왕)는 이전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서 이집트를 공격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낙마로 인해 죽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그의 아들인 소터(셀류커스 3세; 227-223년)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소아시아의 군사 원정 중에 음모로 인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안티오커스 3세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주전 223-187년). 셀류커스 3세와 안티오커스 3세는 군사 정복을 통해서 시리아의 훼손된 국익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이때에 큰 아들은 소아시아로 진격했으며, 작은 아들은 이집트로 진격했다. 그리고 그때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포함된 시리아 변경을 포함하는 북쪽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이 때의 원정(주전 219-217년)을 통해서 이집트 군을 이스라엘 남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남방 왕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 왕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는 그의 손에 넘겨 준 바 되리라(11).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의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 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은 더하지 못할 것이요(12),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군대를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13)." 

 후에 시리아의 두 왕의 공격을 받은 필로파터(프톨레미 4세; 221-204년)는 그들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서 많은 군사들을 죽였고, 안티오커스 3세의 침략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에 안티오커스 3세 대왕은 다시 대군을 모아서 이집트 왕 필로파터를 물리쳤다. 한편 톨레미 4세는 그 전쟁에서의 승리로 인해 크게 교만해졌다. 그는 교만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멸시하여 대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후에 그는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주전 B.C. 203). 후에 라피아 전투에서 톨레미 4세에게 패한 안티오쿠스 3세는 페르시아 지방과 아시아 지방을 원정하여 북으로는 카스피 해, 동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B.C. 212-204). 이로 인해 그는 다시 국력을 배가시켰으며, 애굽의 내정 불안(14절)을 기회로 다시 톨레미 왕조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 때에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네 백성 중에서도 포악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환상을 이루려 할 것이나, 그들이 도리어 걸려 넘어지리라(14). 이에 북방 왕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가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15), 오직 와서 치는 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니 그를 당할 사람이 없겠고 그는 영화로운 땅에 설 것이요 그의 손에는 멸망이 있으리라(16)."

 
 당시에 톨레미 왕조는 톨레미 4세의 죽음으로 인해 4살된 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하여 되었다(B.C. 203). 그러나 나이 어린 아이의 즉위로 인해 나라는 내부적인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 때에 이집트는 여러 나라의 공격을 함께 받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필립 5세와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전쟁을 이용해서 이집트와 시리아로 부터 독립해 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의 시도는 톨레미 왕조의 '스코파스'(Scopas) 장군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후에 안티오쿠스 3세는 마게도냐의 빌립과 동맹을 맺고 톨레미 왕조를 공략하여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그의 군대들은 파니움 전투에서 애굽의 스코파스의 군대를 격파했으며(B.C. 200), 애굽 군대는 페니키아 해변의 시돈('견고한 성읍')까지 퇴각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시돈마저 함락이 되었으며, B.C. 198년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은 안티오쿠스 3세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의 나라를 망하게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17). 그 후에 그가 그의 얼굴을 바닷가로 돌려 많이 점령할 것이나 한 장군이 나타나 그의 정복을 그치게 하고 그 수치를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18), 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려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19). 그 왕위를 이을 자가 압제자를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이 없이 몇 날이 못 되어 망할 것이요(20).."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안티오쿠스 3세는 후에 애굽 침략 정책을 포기하고 정략적으로 애굽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B.C. 197). 안티오쿠스 3세는 자기 딸 클레오파트라를 톨레미 5세의 왕비로 주어(B.C. 195) 톨레미 왕조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클레오파트라가 남편 톨레미 5세와 결탁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음으로 안티오쿠스 3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애굽 침략 정책을 수정한 안티오쿠스 3세는 힘을 서쪽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집중시켜 육로와 해로를 점령했다B.C. 197). 그러나 그의 군대는 B.C. 190년에 막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의 루키우스 스키피오 장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인해 안티오쿠스 3세는 본국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후에 바닥난 재정을 메꾸기 위해서 엘리마이스의 벧 사원을 약탈하려 했으나, 이 시도마저 실패함으로써 그 생애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B.C. 187). 그 후에 안티오쿠스 3세의 뒤를 이어 셀류쿠스 4세인 필로파토르(B.C. 185-175)가 왕이 되었다. 그는 전쟁에서 패배한 부왕의 전쟁 배상금을 물기 위해서 강제로 세금을 거두기 위해 재무 장관 헬리오도루스를 임명했다. 그리고 헬리오도루스는 필로파토르의 명을 받아 팔레스타인(아름다운 곳)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제적으로 세금을 징수했다. 후에 재무장관 헤리오도루스는 자기를 장관으로 임명한 셀류쿠스 4세를 독살했으며, 이로 인해 10여 년에 걸친 셀류쿠스 4세의 통치가 끝이 나고 말았다.


 
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안티오쿠스 4세)에 관한 예언(21-39)

  21절부터 395절까지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4)의 등장과, 그의 사악한 범죄 및 유대인 박해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이미 (단 8:9-12, 23-25)에서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언급된 바 있는 인물이다.


 * 에피파네스의 등장과 세력 강화(22-27)

 
 "또 그의 왕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이라. 나라의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가 평안한 때를 타서 속임수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21), 넘치는 물 같은 군대가 그에게 넘침으로 말미암아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며(22).."

  21절에서 그는 '비천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비천하다'고 번역된 말(바자)은 원래 '비열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의 즉위 과정과 통치 행위를 살펴보면 그는 참으로 비열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현저한 자"라는 뜻을 가진 '에피파네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바꾸어 "미친 자"라는 뜻을 가진 '에피마네스'라고 불렀다. 본문은 원래 그가 왕위를 차지할 자격자가 아니었지만, 평안한 때에 속임수를 써서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21). 그는 안티오쿠스 3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이 로마에 패배한 후(B.C. 190)에 로마에 인질로 끌려가서 14년을 그 곳에서 지냈다. 후에 그는 형(셀류쿠스 4세)의 아들, 즉 조카인 데메트리우스를 자기 대신 로마에 인질로 남겨두고 시리아로 귀환했다. 그때에 그는 형(셀류쿠스 4세)가 장관 헬리오도루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형을 독살한 헬리오도루스를 제거하고 로마에 있는 조카 대신 왕이 되었다. 그는 권모술수로 조카에게 돌아갈 왕좌를 탈취했으며, 후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온갖 악한 흉계와 권모 술수를 부렸다.
22절은 에피파네스가 넘치는 물과 같은 군대에게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넘치는 물과 같은 군대는 애굽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애굽 군대는 시리아를 공격한 후에 에피파네스를 공격했다. 이때에 유대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 III)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에피파네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에피파네스는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서 그들을 방심하게 만든 후에, 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후에 에피파네스는 그들을 격파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던 유대 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제사장에서 폐위시켜 버렸다.

  "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소수의 백성을 가지고 세력을 얻을 것이며(23), 그가 평안한 때에 그 지방의 가장 기름진 곳에 들어와서 그의 조상들과 조상들의 조상이 행하지 못하던 것을 행할 것이요, 그는 노략하고 탈취한 재물을 무리에게 흩어 주며 계략을 세워 얼마 동안 산성들을 칠 것인데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하리라(24). 그가 그의 힘을 떨치며 용기를 다하여 큰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남방 왕도 심히 크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울 것이나 능히 당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계략을 세워 그를 침이니라(25). 그의 음식을 먹는 자들이 그를 멸하리니 그의 군대가 흩어질 것이요 많은 사람이 엎드러져 죽으리라(26). 이 두 왕이 마음에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임이니라(27).

  에피파네스는 위장된 동맹을 통해 상대를 속이고 그들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이러한 침략을 통해 얻은 노략품을 백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백성들의 환심을 얻었다(마카비상 3:29-31). 이 승리로 인해 에피파네스는 비교적 적은 군사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을 세상에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해서 자기를 좆는 자들에게 주었다(23-24). 25-26절은 에피파네스의 제 1차 애굽 침공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마카비상 1:16-19). 안티오쿠스는 나라를 안정시킨 후에 이집트를 공격하였다(170년). 이집트는 수많은 대군을 이끌고 펠루시움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에피파네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의 누이(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즉 조카 톨레미 6세 필로메토르(Philometor, B.C. 180-146)를 공격하여 그를 포로로 잡았다. 필로메토르는 에피파네스에 의해 매수된 측근들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하고 말았다. 26절에 언급된 '자기의 진미를 먹는 자'는 곧 필로메토르에게 가장 신임받던 측근들을 가리킨다. 톨레미 6세가 포로로 잡혀간 애굽은 대신 그의 동생인 톨레미 7세 피스콘(Piscon, B.C. 170-117)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때에 에피파네스는 애굽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투옥된 톨레미 6세와 강제로 평화 조약을 맺고, 톨레미 7세와 톨레미 6세를 분열시키려고 했다. 톨레미 6세 역시 위기를 모면한 후에 때를 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 조약은 후에 톨레미 6세와 톨레미 7세가 연합하고, 포필리우스 라에나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의 간섭으로 인해 파기되고 말았다.


 *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정책(28-35)

  "북방 왕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본토로 돌아갈 것이며(28),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29),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맺은 거룩한 언약에 분노하였고 자기 땅에 돌아가서는 맺은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필 것이며(30),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31).." 

  안티오쿠스는 전쟁을 통해 얻은 수많은 재물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을 더럽힘으로 유대인들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행동을 하고, 성전을 크게 더럽힌 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28). 그는 후에 군대를 다시 정비해서 이집트를 치려고 원정 길에 올랐으나, 로마에서 파견한 깃딤의 해군에 의해 반격을 받았다. 이때에 로마 원로원 포필리우스 라에나스는 안티오쿠스에게 이집트와 언약을 맺는 일을 금지했으며, 결국 그는 이러한 로마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집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29-30). 그는 돌아가는 길에 또 다시 예루살렘에 들려서 거룩한 땅과 성전을 유린했다. 그는 모세의 법을 제한했고, 언약을 버리고 헬라와 타협하는 자들을 후대했으며(30), 성전의 문을 닫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금지시켰다(31). 그는 안식일에 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도시를 약탈하고 방화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주의를 종식시키고 그들을 헬라화하기 위해서 종교 관습(할례와 절기와 같은)을 금하고 율법서를 불태워버렸다. 또한 그는 성전 밖에 있는 번제단 위에 유대인이 우상으로 간주하는 제우스 제단을 세웠고(주전 167년 12/16), 그 제단에서 율법에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하고 있는 돼지를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리고 했다(31).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32).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하리라(33). 그들이 몰락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속임수로 그들과 결합할 것이며(34),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35).
 

  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우스를 섬기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경건한 소수의 무리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켰다(32). 안티오쿠스의 명령에 불복종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안티오쿠스의 칼과 불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으며, 포로가 되거나 약탈을 당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33). 주전 166년에 제사장 맛다디아스는 안티오쿠스의 정책에 반항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쳤다. 처음에는 매우 적은 사람들이 맛다디아스의 세력에 동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수많은 경건한 무리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었다. 후에 그들은 안티오쿠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정신병으로 죽은 해(주전 164년 말)에 성전을 다시 회복하고 이를 정결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진 고난과 역경은 부정했던 유대인의 신앙을 정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정한 기한이 찰 때까지 신앙의 싸움을 게속했다.

(단 11:5-35)에 나타난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시드 왕조

프톨레미 왕조(남방왕 이집트)

셀류시드 왕조(북방왕 시리아)

프톨레미 1세 소터(323-285)(5절)

셀류커스1세 니카토 (321-281년)(5절)
안디오커스 1세 소터(281-262년)(6절)

프톨레미2세 필라델푸스(285-246)(6절)

안디오커스 2세 테오스(262-246년)(7-9절)

프톨레미3세 유게테스(246-221)(7-8절)

셀류커스 2세 칼리니쿠스(246-227)(10절)

프톨레미4세 필로파터(221-204)(9-11절)

셀류커스 3세 소터(227-223년)(10-11절)

프톨레미5세 에피파네스( 204-181)(17절)

안티오쿠스 3세(223-187년)(13-14,19절)

프톨레미6세 필로메터(181-145)(25절)

셀류커스 4세 필로파토(187-176년)(20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175-163)(21-32절)


  (단 11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45절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단 11:39-45)은 역사적인 에피파네스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장차 올 적그리스도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부분이므로, 다음 시간에 이에 대해 따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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