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09과)

선지서 개론 (2) : 선지자의 기능과 성령


제 3장 예언자의 기능

  우리는 앞에서 예언자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는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두 가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메시지를 전할 때에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전달했는가?

 3-1. 수단 

  가. 선포

  예언자가 말씀을 전하는 수단 중에서 가장특징적인 것은 선포이다. 여기에서 선포의 개념은 가르침의 개념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주로 듣는 자의 지성에 전달하지만, 선포에 있어서는 감정과 의지에 대하여 전한다. 가르침의 목적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선포의 목적은 반응과 응답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역할은 전자였으며, 예언자의 역할은 후자였다.

  따라서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호 4: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호 5:1). 이들 두 메시지에서 선지자는 백성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라고 선포하고 있다. 아모스는 그의 예언을 금하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 내가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다고 대답했다(암 7:5). 아모스의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돌이켜서 여호와를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예언자들은 아무도 율법이 말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을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로부터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렘 2:2). 그는 때로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렘 7:2),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 곧 성문에 서서(렘 17:19)", 그리고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렘 19:2)에 서서 그것을 외쳐야 했다. 이곳들 모두는 공공장소였기 때문에, 그의 선포는 성전으로 들어가거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선포의 개념과 예언의 개념을 연관시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예언자들이 예언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데이비슨(A. B. Davidso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언자는 항상 그 당시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것은 먼 후세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데이비슨은 예언자들이 초자연적으로 미래의 일을 예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고레스왕보다 15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는 고레스의 통치를 예언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이름까지 언급했다(사 44:28, 45;1). 다니엘은 환상을 통하여 네 개의 왕국이 그의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는데-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이것은 900년에 걸친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었다(단 7장). 이와 같이 예언자들은 분명히 미래의 일에 대해 예고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한 자기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예언자의 주된 임무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언한다"는 말을 "예견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보는 것을 잘못된 일이다. 물론 예언자들은 때로 미래의 일을 예견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주된 임무는 바로 그 당시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설교자들과도 같았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미래를 보여주실 때에만 미래의 일을 선포했던 것이다.    


  나. 특정한 개인들

  한 나라의 도덕적, 종교적 조건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지도력에 크게 의존한다. 만일 지도자들이 스스로 옳게 행하면 백성들도 그렇게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언 방법의 도 다른 면은 이스라엘의 특정 인물들과 접촉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왕의 경우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유다의 왕 아하스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한 징조를"(사 7:11) 구하도록 권고했다. 그때에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사 7:12)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에게 한 표적을 주면서(사 7:14), 앗수르의 침략의 위협에 대하여 그에게 말했다. 때로 왕은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던 당시의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그렇게 했다. 그는 과연 여호와께서 위기에 처한 그의 백성을 도우러 오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예레미야에게 두 사람을 보냈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우리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라!"(렘 21:2)고 요구했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응답은 시드기야가 결코 듣기를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렘 21:4-5).

  왕과 접촉했던 예언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사울에게는 사무엘이, 다윗에게는 나단과 갓이, 르호보암에게는 스마야가, 여로보암에게는 아히야와 "여호와의 사람"이, 아합에게는 엘리야와 미가야가, 여호람과 예후에게는 엘리사가, 아사에게는 아사랴와 하나니가, 여호사밧에게는 예후가, 요아스에게는 스가랴가, 아마샤에게는 이사야가, 그리고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에게는 예례미야가 갔다. 물론 이러한 특정인들과의 만남은 선포라기보다는 개인적 만남이었다. 전기 예언자들은 주로 이러한 만남에 주의를 기울였던 반면에, 후기 예언자들은 이러한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후기 예언자들은 대중과의 접촉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전기 예언자와 같이, 특별히 경우에는 개인적인 접촉도 하였다.


  
다. 상징적 행위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들은 그들이 전하기를 원했던 진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엘리사는 어느 날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에게 창문 밖으로 화살을 쏘라고 말했다. 왕이 그렇게 하자, 엘리사는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말을 했다.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왕하 13:17)." 엘리사는 계속해서 왕에게 화살을 취하여 땅을 치라고 말했다. 이에 왕은 화살을 취하여 땅을 세 번 쳤다. 그런데 이것이 선지자를 노하게 만들었다. 엘리사는 왕이 땅을 세 번만 쳤기 때문에, 그가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왕하 13:18-19). 여기에서 화살로 땅을 치는 것은 여호아하스가 그의 원수인 아람을 치는 횟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가 지중해 연안에서 아스돗을 칠 때에 이사야에게 그 몸에서 베를 풀고, 그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행위는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사 20:4)" 드러낼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사야의 상징적인 행동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과 동맹을 맺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취해진 행동이었다. 어느 날 예레미야는 질그릇을 가지고 힌놈 골짜기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 앞에서 질그릇을 깨뜨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렘 19:11)." 산산조각이 난 질그릇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징들은 선지자의 메지시를 인상깊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또 다른 경우에 예레미야는 상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레갑 족속의 경우를 인용했다. 레갑 족속의 관습 중 하나는 포도주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성전에 데려다가 그들 앞에 포도주 항아리를 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레갑 족속들은 조상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들의 순종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레갑 족속은 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모델로 제시되었다. 에스겔 역시 그의 예언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징을 사용하였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반석 위에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 포위가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겔 4:1-3). 또 다른 경우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머리와 수염을 밀고, 그것들 중에서 약감은 태우고, 약간은 바람에 날려버렸다(겔 5:1-2).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불태움과 탈취와 흩어짐을 당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상징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호세아가 그의 아내 고맬과 혼인한 것일 것이다.어느 날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 여인과 혼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녀가 "음란한 여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호 1:2). 호세아는 고멜과 혼인하였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같이 그녀는 음란한 자녀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자녀들의 이름도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로 지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고,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을 상징하였다(호 1:4).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뜻)로서, 이는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였다(호 1:6).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을 의미하였다(호 1:9). 후에 고멜은 그녀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호 3:1-3). 이것은 호세아의 경험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순종하였다. 고메리 그에게로 돌아왔을 때에, 그는 그녀가 처음 그에게 왔을 때의 생활 방식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그녀는 그에게 불성실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해 불성실했다. 또하 고멜이 호세아를 떠나서 그녀의 다른 정부에게로 갔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거짓 신들을 추구했다. 또한 호세아가 그녀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고멜을 다시 그의 아내로 취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셨다.
 

  라. 시각적 교훈들

  예언자들이 도입한 또 다른 문학적 수단은 시각을 통한 교훈이었는데, 예언자의 눈에 비친 어떤 물질이나 행위는 그의 마음에 한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진리를 더욱 강조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그러한 물질이나 행위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러한 수단을 가장 많이 사용한 예언자일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렘 1;11)를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에게 "네가 잘 보았도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어로 살구 나무, 즉 "샤켇"은 동시에 "주의를 기울여 지킨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에레미야는 이처럼 어린 살구 나무 가지를 보았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말씀하신 바, 심판의 경고가 그 백성에게 임하도록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잠시 후에 예레미야는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다(렘 1:13-1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끓는 가마는 환난과 곤고를 의미하였다. 그것이 북에서 기울어진 것은 그 환난이 북으로부터 임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북쪽의 방향을 특별히 지적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실 바벨론이 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물론 바벨론은 팔레스타인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유프라테스 강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따라 가다가 북쪽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나 예루살렘에 이른다.

  예베미야는 또 베띠를 사용하는 시작적 교훈을 사용하였다(렘 13:1-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그것을 잠시 동안 허리에 띠었다가, 씻지 말고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고 말씀하셨다(렘 13:4). 예레미야가 그렇게 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 띠를 다시 찾아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가 다시 그 띠를 찾았을 때에 그것은 이미 썩어 있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렘 13:9)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유다가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며칠 동안 띠를 허리에 띠었다가 땅에 묻은 것은 유다 백성이 잠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가, 죄와 함께 땅에 묻힐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띠를 유프라테스 강에 가지고 간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유프라테스 강이 있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실 것을 상징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다시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 띠를 가져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에 바벨론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로 가셔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유프라테스 강이 예레미야가 단순히 띠를 묻고 다시 그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두 번이나 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인한다. 물론 그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지만-그 강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250마일을 가야한다-그 곳에 두 번씩이나 갔다는 사실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묻혀진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바로 이만큼 떨어진 곳으로 사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또 다른 시각적 교훈을 발견했다(렘 18:1-10). 그는 토기장이가 녹로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려서 더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토기장이가 깨진 그릇을 가지고 더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파멸된 이스라엘을 가지고 더 좋은 백성으로 만드실 권한이 잇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상징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장차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당시에 하나님의 눈에 깨진 그릇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유배 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신 후에 다시 더 좋은 그릇으로 만드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경우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전 앞에서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본 것이었다(렘 24:1-10). 그런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었다(렘 24:2). 좋은 무화과는 "처음 익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첫 번째 추수(6월 말경)에서 얻어진 것으로 가장 귀한 열매였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준 상징은 유배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그 상징이 제시되고 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예레미야가 무화과를 본 정확한 때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직후의 일이었다(주전 597년). 그 당시에는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 위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화과는 이제 막 사로 잡혀간 자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로 잡혀간 자들을 좋은 열매로 여기셨기 때문에, 때가 이르면 그들을 다시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우고 허물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을 심고 뽑지 아니할 것이다(렘 24:6).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새로운 마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나쁜 무화과는 이스기야의 지도 라애 유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잡혀간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그 곳에 남아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고 말거리가 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렘 24:9). 다시 말해서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는 그 땅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3-2. 사명

  가. 새로운 가르침에 의한 혁명이 아닌 개혁

  한 세대 전만 해도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후기 예언자들(성경을 기록한 예언자들)을 새로운 가르침에 의한 혁명가들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일신론과 윤리적인 요구와 관련되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자들로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경배자들에게 윤리적인 행위를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혁명가라기보다는 개혁자들로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예언자의 메시지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이스라엘의 가르침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최근의 입장은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과 훨씬 더 일치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윤리적인 유일신론을 주장하는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그 초창기 역사로부터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그 분이 윤리적인 분이라는 것을 믿어왔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전기 예언자들과 성경을 기록한 후기 예언자들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언자들의 주된 임무는 개혁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죄에서부터 돌이켜서 율법의 가르침으로 돌아서기를 원했다. 이러한 임무를 위해 후기 예언자들은 많은 청중들에게 말한 후에, 다시 그들의 메시지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기 예언자들은 주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말했다. 예언자들은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혁명가들이 아닌 이유는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믿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이미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며, 또한 처음부터 제사장들에 의해 가르쳐 진 것이었다.


  
나.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함

  개혁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 먼저몇 가지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a. 율법 그대로의 가르침이 아님
  예언자들은 율법을 그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제사장의 임무였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그 항목별로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종류의 가르침은 일정한 장소에서 배우는 자와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조건은 지정된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들만이 만족시킬 수 있었고,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예언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예언자들이 가르친 것은-그들이 기록한 예언서에서 나타나듯이-율법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것을 항목별로, 그리고 순서대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b. 율법의 관점에서의 개혁의 요구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예언자들의 임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도록 고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도록 격려했다. 이러한 점은 특히 후기 예언자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모스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암 4:1)." 또한 이사야도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있을진저!(사 10;2)" 또한 예언자들은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문제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고 외쳤으며, 미가도"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미 6:1)"라고 외쳤다.

  전기 예언자들도 역시 후기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가가 아닌 개혁자들이었다. 사무엘이 개혁자의 역할을 감당한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이때에 그는 엘리 제사장의 방탕한 집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엘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삼상 3:1-18). 백성들을 개혁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그가 미스바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요청한 데서 절정을 이루었다(삼상 7:1-14).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개혁을 요구했으며(왕상 13;1-10), 하나님도 아사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셨다(대하 16:7-9). 또한 아합과 이세벨의 다스림과 관련하여 갈멜산에서 행한 엘리야의 행위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왕상 18장).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 전기 예언자들은 개인이나 몇몇 사람들을 향해 개혁을 부르짖었다.

  c. 율법에 대한 언급이 적음
  예언자들은 이러한 개혁의 메시지를 선포함에 있어서 율법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예언자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라고 권고할 때에 당연히 율법에 대해 언급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 예언자들이 율법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 지에 대해 의문이 일어난다. 아이히로트(Eichrodt)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언서에서 율법(토라)이 적게 언급된 것은 '종교 의식에 있어서의 죽은 형식주의와 기계적인 반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은 율법의 의식을 그 자체로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의식을 율법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러한 생각이 그들을 죽은 형식주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자주 언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삶 속에 적용하는 문제를 더 강조했다.

  d. 율법 안에서의 묘사의 결여
  우리는 이미 예언자들이 율법 속에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사장들처럼 율례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유는 예언자들이 새로운 사상에 의한 혁명가들이라기 보다는 개혁가들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가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요구되었다. 백성들은 그들이 가야 할 정상적인 길을 떠났기 때문에, 다시 그 길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상태, 또는 그들이 행해야 할 상태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다. 율법은 백성들의 이상적인 상태를 위하여 제장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 속에서 제사장들에 의해서 율법을 배움으로 그것을 따를 수 있었다. 만일 백성들이 제사장이 가르친대로 율법을 따라 살았다면 그들에게 개혁가인 예언자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언자는 백성들이 정상적인 길에서 떠났을 때에 그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는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태에서의 율법 속에서 묘사하지 않았다. (신 18장)에서 묘사된 예언자에 대한 부분이 개혁가들의  역할보다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하는 자로서 묘사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다. 판단 파수꾼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중재

  예언자의 임무는 개혁 외에도 세 가지의 역할을 요구하였다. 이들 세 가지 역할은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구별되기 때문에 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행위에 대한 판단자
  첫째로 예언자의 역할은 백성들의 행위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렘 6:27)"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같이 굳게 서서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해야 했다. 그가 따랐던 기준은 물론 율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행하고 있는 지를 알기 위해서 예레미야의 판단을 의지해야 했다.

  * 영적 파수꾼
  둘째로 예언자의 역할은 백성들 중에서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해야만 했다. 에스겔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가 이러한 경고를 한 경우에는 백성들이 죄 가운데서 죽어도 선지자에게는 그 책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선지자가 이를 경고하지 않으면 그들의 피를 선지자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동일한 개념은 (겔 33:7)이후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에게 있어서 파수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예언자는 위기에 직면하여 이러한 경고를 해야만 했다. 만일 그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죄 속에서 죽어간다면, 적어도 그의 손은 그 죄로부터 깨끗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경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가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 영적 중재자
  셋째로 예언자의 역할은 중재자로서의 역할이었다. 물론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언자들 역시 의식 행위와는 별도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한 예언자들은 다음과 같다. 전기 예언자들 중에서는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해 예언하기 위해서 유다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곳에서 여로보암은 그 예언자의 말을 중지시키려고 하다가 그의 손이 말라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예언자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왕상 13:6)"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간청을 듣고 중재자 역할을 하여 그의 손이 다시 회복되게 하였다. 또한 엘리야도 이러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어느 날 사르밧의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중재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재를 들으시고 소년의 목숨을 돌이키심으로 그 어미에게 큰 기쁨을 주셨다(왕상 17:17-24). 수년 후에 엘리사는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수넴 여인의 어린 아들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수행했다. 소년이 죽게 되자, 그 모친은 즉시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는 그 모친의 집으로 가서 어린 아이를 위해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여 그 생명을 다시 살려서 그 모친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왕하 4;18-37).

  성경을 기록한 후기 예언자들 역시 백성들을 위해 여러 차례 중재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땅이 황충에 의해서 먹히게 되자, 하나님께 대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암 7:2)" 본문은 계속해서 아모스의 중재의 결과로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아니하시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모스가 본 것과 같이 황충에 의해서 몰려올 재난이 그의 중재로 말미안아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다른 어느 예언자들 보다도 더 많은 중재자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에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내 눈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해 망함이라(렘 14;1)."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0-21)"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에레미야에게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지 말라고 요구하셨다. 예를 들면 (렘 7:16)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해 브르지저 구하지 말라! 내거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렘 11:14 참조)"


제 4장 성령과 예언

 4-1. 정의

  자유주의 학자들은 구약에 언급된 성령을 단순한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 정도로 이해한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을 단순히 무아경에 빠지게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령을 하나님의 3위 중 하나로 보는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물론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체계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성령을 하나님과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령을 단순한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여기에서 "보낸다"는 단어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주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을 기대할 수 있다. 보냄을 받은 영은 그것을 보낸 분과 구별되어야만 한다. 또한 그 영이 창조하고 그것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그 속에는 인격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나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요청했다(왕하 2:9). 같은 문맥 속에서 50인의 선지자의 생도들은 "여호와의 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구한 "영감"과 동일함을 암시한다. 여기에 언급된 성령은 하나님 자신과는 구별되는데, 이는 성령에 엘리사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가 큰 능력을 받았다는 말이 성령의 인격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 역시 성령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성령께서 중요한 순간에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겔 3:12)에서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텔아비브에 이르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겔 3:15). 또 그는 (겔 11:1)에서도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인 문에 이르시기로...."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 자신을 구별하고 있으며, 성령이 그를 위해 이러한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언급은 모두 성령의 인격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기자는 (창 1:2)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은 3위의 성령께서 인격적인 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그가 할 일이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선언하셨다(슥 4:6). 이러한 언급역시 3위의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과 제 3위의 성령이 하시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4-2. 구약 시대에 성령에 의해 주어진 능력

  구약 시대의 성령은 자주 사람들 위에 임하였고, 때로 그들은 다시 떠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16:13). 이러한 구절들은 개인에 관한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능력을 받는 경우에 해당된다. 4명의 사사 위에 성령이 임한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사사기 기자는 옷니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 싸울 때에(삿 3:3,10)...." 이때에 성령이 옷니엘에게 임한 목적은 그로 하여금 나가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사기 기자는 기도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 때에 아베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좆고(삿 6:34)...." 이때에 성령이 기드온에게 임하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무리들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침략한 미디안인들과 싸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사기 기자는 입당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당에게 임하시니 입다가....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삿 11:29)...." 이 경우에 입다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암몬 족속과 싸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사기 기자는 삼손에 대해서도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삿 13:25, 14:6,19 15:14). 이 경우에 여호와의 신에 그에게 임한 이유는 그로 하여금 큰 능력을 행하여 블레셋 족속에 대항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4-3. 예언자들이 받은 능력

  가. 일시적으로 능력을 받은 예언자들
  그러나 사사들이 받은 능력은 예언자들이 받은 능력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로 사사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채워졌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책임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채움을 받았다. 예를 들어 아사랴가 전쟁에서 돌아온 유다 왕 아사에게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후에 아사랴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대하 15:1-17). 이것은 성령께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그에게 임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경우는 야하시엘의 경우이다. 야하시엘은 아사의 후계자인 여호사밧의 통치 때에 세 개의 강력한 세력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한 결과로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다(대하 20:14)." 그 결과로 야하시엘은 백성들에게 용기와 충고를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나. 지속적으로 능력을 받은 예언자들
  둘째로 지속적으로 능력을 부여받은 예언자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 대부분은(대선지자들을 포함해서) 개인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채워지거나 능력을 받은 것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상 16명의 예언서 기록자들 중에서 오직 두 명(미가와 에스겔)만이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능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그들도 성령을 능력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이 임해 있었다. 첫째로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포로 전 예언자들에 대해 언급한 두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옛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느 9:3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이것은 포로 전의 예언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이 곳에서 어느 특정한 예언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포로 전 선지자들을 모두 통틀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구절은 (슥 7:12)인데, 이 곳에서 예언자는 포로 전의 이스라엘의 죄, 특히 "만군의 여호와께서 신으로 이전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않는 죄"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능력을 받았다고 증거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성령의 능력을 갑절이나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엘리야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또한 그 후에 엘리사도 그 능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미가 역시 이를 증거하고 있다. 미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미 3:8)...." 우리는 미가가 단순히 "나는 채움을 입었다", 또는 "주의 신이 내게 임하였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채움이 과거에 일어낫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그가 예언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이러한 채움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에 살펴볼 예언자는 에스겔이다. 그는 여러 구절에서 자신이 성령에 의존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에를 들어 (겔 2:2)에서 그는 "그 신이 내게 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결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겔 3:14)에서는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그는 11번씩이나 그에게 어떤 목적을 위해 들어갔거나, 그를 다른 장소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에스겔이 지속적으로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았으며, 또한 특별히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세 번째 증거는 이스라엘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성령에 의해서 지속적인 능력을 받은 다른 사람들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살펴볼 인물은 모세이다. 성령이 모세에게 처음으로 임할 때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광야에서 70인 장로들이 능력을 받은 것에 대한 기록 속에는 모세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이 70인장로들은 모세를 보좌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에게 이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민 11;17). 이러한 언급은 모세와, 그를 보좌하는 70인의 장로들이 그들이 맡은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에 살펴볼 인물은 사울이다. 하나님의 영은 사울에게 임시적으로 임했으며, 그 후에는 지속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삼상 10장, 11:16). 그런데 (삼상 16:14)에 가면 하나님의 신이 사울을 떠났다는 언급이 있다. 이는 여호와의 신이 사울을 떠날 때까지 그에게 계속적으로 임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사람은 다윗이다. 성령이 사울을 떠났다고 언급한 후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여기에서 "이날 이후로"라는 구절이 특히 중요하다. 이것은 사무엘에 의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미래의 왕으로 지명된 때를 의미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 51:11)의 다윗의 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간구는 다윗 자신이 성령의 지속적인 능력을 받았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고 있음을 알았고, 이것이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일 모세나 다윗이 지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 역시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지속적으로 능력을 채움 받은 반면, 소수의 예언자들은 일시적으로 채움을 받았다. 이는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이 일시적인 성령의 사역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즉 아사랴나 야하시엘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언을 전하기 위해서 단 한 차례만 사용하신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이후로는 결코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다. 대선지자들이나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자들은, 지속적으로 채움을 입은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예언자였으며, 하나님은 자기 사역을 위해 그들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셨다.


 
4-4. 예언자의 기능에 대한 재고찰

  우리는 앞에서 예언자의 기능은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무, 즉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앞에서 이 두 가지 기능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다루었지만, 계시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곳에서 성령과 관련하여 예언자가 계시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가. 말씀의 선포
  "나비"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 광란이나 찬양과 관계되어"하나님을 대신해서 격정적으로 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격정적으로 말하는 경우에는 그 선포를 강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 속에는 상징적 행위, 대상물을 통한 교훈, 그리고 특정인을 향한 선포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은 특별한 능력이 필요했다. 상징적인 행위나, 대상물을 통한 교훈이나, 특정인에 대한 선포 등을 사용해서 말씀을 선포할 때에, 예언자는 그 말씀이 권위 있고 효과있게 전하기 해서 하늘로부터의 능력이 필요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거나, 계시된 내용 이외의 정보를 수집, 분류하는 데 적용되었다. 예언자들은 예언서를 기록할 때에 그것이 성경의 일부를 이룰 것이기 때문에, 입으로 말할 때보다 더 큰 능력이 주어졌다. 성경은 예언을 기록하는 경우에 단어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도록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입으로 선포된 예언도 그러했는 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은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이다. 


 
 나. 말씀을 받는 것
  예언자들은 계시를 받을 때에 자연적인 현상을 초월하는 체험을 했다. 그들이 예언을 받을 때에 하나님과의 접촉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게 되었다.

 <자기 암시가 아님>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받은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암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받은 계시에는 자기 암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계시를 받고 그것을 전파했으며, 결코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암시를 걸어서 계시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예언자 자신이 계시적 경험을 시작하지 않음>
  또한 예언자는 계시를 받을 때에 자신이 먼저 계시를 얻으려고 시작하지 않았다. 계시는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으며, 예언자는 그것을 받았을 뿐이다. 대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게시를받기 위해서 먼저 계시적인 행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소년이었을 때에(삼상 3:4-14) 밤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소리를 엘리 대제사장이 부르는 소리로 알았다. 후에 그는 엘리 대제사장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이 여호와의 부르심인 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무엘을 불러서 그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해 주셨다. 물론 때로 예언자들이 계시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예언자들이 이렇게 하기도 했다. (삼상 8장)에서 사무엘은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무제에 대해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계시를 주도하셨다. 사무엘은 오직 간구한 후에 기다릴 수 있었을 뿐이다.

 <이성적인 능력을 잃지 않음>
  예언자들은 계시를 받을 때에 이성적인 능력을 잃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예언자들이 무아경에 빠졌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러한 주장을 옳지 않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가시 덤불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라고 지시하셨다. 이때에 모세는 자기의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이를 거절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경우 모세는 결코 이성적인 능력을 잃지 않았다(출 3:4). 소년 사무엘은 그가 계시를 받은 다음 날 아침에 엘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모든 메시지를 그대로 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무엘이 게시를 받을 때에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본 후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했으며, 후에 일군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사자로서 자원했다(사 6:1-8). 이러한 이사야의 모습은 결코 이성을 잃은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한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요소가 포함됨>
  예언자들이 계시를 받을 때에는 그들이 이성의 능력을 잃지 않았지만 이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요소가 초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무아경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외부로부터 주어진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했다. 그들은 이성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초월한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성이 무시되지 않은 채 하나님과 접촉한 것이다. 그들의 인건적인 마음은 그 한계성을 초월하여,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그 순간에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예언자는 항상 말씀을 들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서슴없이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그 말씀을 인해 고난을 당하고, 때로 순교할 각오까지 했다. 미가야는 말씀을 인해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감수했다(왕상 22:26-28). 스가랴는 말씀을 인해 돌에 맞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대하 24:20-21). 예레미야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준비된 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일을 감수해야 했다(렘 38:4-6).


 
다. 성령의 역사로서의 초자연적 현상
  이러한 초자연적 요소는 성령의 선물이었다. 성령은 계시를 주셨으며, 또 그 내용이 올바로 전달되게 하셨다. 첫째로 예언자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일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어느 "하나님의 사람"은 장차 요시야라는 왕이 나타나서 벧엘의 제단에서 제사하는 제사장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예고했다(왕상 13:1-2). 이 일은 약 300년 후에 사실로 이루어졌다(왕하 23:16). 또한 이사야는 바사왕 고레스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그의 통치를 예고하였다(사 44:28, 45:1). 둘째로 성경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바로 제 3위의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이 계시가 주어질 때에 예언자들은 계시를 경험하게 되었으며(민 24:2-, 대상 12:18), 인간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항상 성부와 성자를 통해 가능케 된 은혜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벧후 1:21)을 보면 분명해진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인이니라." "감동하심을 입는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인도함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음"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은 예언자가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성령께서 계시를 주도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용어이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계시 행위에 있어서 어떻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는가? 첫째로 예언자는 계시를 받을 때에 건전한 태도로 그것을 받았다. 성령에 의한 계시적인 접촉은 아무 때나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계시를 받기 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했다. 엘리사는 이러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거문고 타는 자를 요구하였다. 그는 최근에 세 명의 왕들-이방인 에돔 왕, 바알 숭배자인 여호람, 하나님을 좆다가 패역하게 도니 여호사밧(왕하 3:9-12)-을 만났다. 그들과의 접촉은 엘리사로 하여금 계시를 받기에 부적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계시를 받기 위해서 환경을 변화시킬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다니엘은 3주 동안 금식하면서 간구했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단 10:2-6).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계 1:10-16). 둘째로 이러한 경우에 예언자들은 계시받은 내용을 특별한 방법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정신적인 능력이 고조되어 있었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완전한 형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이 그 계시를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적절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이성의 능력을 가장 예리한 형태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정신적인 능력이 고조되어 이해력과 기억력이 절정에 이르도록 영감될 필요가 있었다. 셋째, 하늘로부터 온 계시는 인간의 지성 속으로 실제로 전달되었다. 예언자의 정신적 기능이 예민해지고, 적절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에, 성령은 예언자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위에 계시의 내용을 더하셨다. 이러한 일은 때로는 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통해서, 또는 모세와 같이 불붙은 가시 덤불을 통해서 주어졌다(출 3:4-). 그러나이것은 들을 수 없는 형태로 인간의 마음 속에 침투한 경우가 더 많았다. 예언자는 고조된 정신적 기능 속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 내용을 아는 동시에 그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위험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라. 꿈, 환상, 그리고 현현
  이러한 직접적인 계시의 형태 외에도 하나님은 계시를 주실 때에 꿈과 환상, 그리고 현현과 같은 수단도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들은 앞에서 묘사된 직접적인 방법과 같이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들이 계시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감당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이러한 수단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꿈에 의한 계시는 그것을 받는 자가 무의식의 상태 속에서 수동적으로 받게 된다. 여기에서 그에게 주어진 대상은 오직 비물질적인 정신적 현상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현현에 의한 계시(천사와 같은)는 그것을 받는 자가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상태에서 계시를 받게 된다. 그는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형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환상에 의한 계시는 이들의 중간적인 형태로서,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상태에서 받게 되지만,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오직 빗물질적인 정신적 현상이다.

  둘째로 이러한 계시의 형태들은 그 차이점 때문에 각기 다른 상황에서 적적하게 사용되었다. 꿈은 영적인 분별력이 거의 없는 자들에게 더 적절했다. 애굽의 바로 왕, 게랄의 아비멜렉,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같은 이교도들에게 이러한 꿈이 주어졌다. 그들은 결코 환상이나 현현을 통한 계시를 받지 않았다. 꿈 속에서 그것을 받는 자는 중립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오직 계시가 주어지는 도구로만 사용되었으며, 그것에 이교도로서 응답하거나 항거할 수 없었다. 야곱은 벧엘에서 꿈을 꾸었고(창 28:12-15), 요셉도 소년 시절에꿈을 꾸기는 했지만(창 37:5-10), 그들은 당시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반면에 현현에 의한 계시는 영적으로 매우 성숙한 자들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계시는 아브라함, 여호수아, 기드온, 마노아, 혹은 다니엘(단 6:22)이나, 풀무불 속에서의 그의 세 친구들(단 3:25)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영적인 이해력을 가지고 있엇기 때문에, 이러한 인격적인 접촉이 적합하였다. 하나님은 또한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에게 환산을 통해 계시하셨다. 아브라함이나(창 15:1), 나단이나(대상 17:15), 에스겔이나(겔 1:1, 8:3), 다니엘(단 8:1) 등은 이러한 환상을 보았다. 환상은 또한 신약 시대에도 게속되었다. 에를 들면 아나니아(행 9:10), 베드로(행 10:3,17,19), 바울(행 16:9)등이 환상을 보았다. 이러한 환상은 꿈이나 현현보다도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비록 이들 세 가지 형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사역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계시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제 3위의 일반적인 사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직접적인 계시의 접촉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분은 또한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즉 성령께서는 꿈과 환상을 보여주셨으며, 현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주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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