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109-1과)

선지서 개론 (3) : 선지자의 기능


제 3장 예언자의 기능

  우리는 앞에서 예언자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는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두 가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메시지를 전할 때에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전달했는가?

 3-1. 수단 

  가. 선포

  예언자가 말씀을 전하는 수단 중에서 가장특징적인 것은 선포이다. 여기에서 선포의 개념은 가르침의 개념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주로 듣는 자의 지성에 전달하지만, 선포에 있어서는 감정과 의지에 대하여 전한다. 가르침의 목적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선포의 목적은 반응과 응답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역할은 전자였으며, 예언자의 역할은 후자였다.

  따라서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호 4: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호 5:1). 이들 두 메시지에서 선지자는 백성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라고 선포하고 있다. 아모스는 그의 예언을 금하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 내가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다고 대답했다(암 7:5). 아모스의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돌이켜서 여호와를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예언자들은 아무도 율법이 말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백성들이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을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로부터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렘 2:2). 그는 때로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렘 7:2),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 곧 성문에 서서(렘 17:19)", 그리고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렘 19:2)에 서서 그것을 외쳐야 했다. 이곳들 모두는 공공장소였기 때문에, 그의 선포는 성전으로 들어가거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선포의 개념과 예언의 개념을 연관시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예언자들이 예언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데이비슨(A. B. Davidso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언자는 항상 그 당시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것은 먼 후세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데이비슨은 예언자들이 초자연적으로 미래의 일을 예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고레스왕보다 15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는 고레스의 통치를 예언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이름까지 언급했다(사 44:28, 45;1). 다니엘은 환상을 통하여 네 개의 왕국이 그의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는데-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이것은 900년에 걸친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었다(단 7장). 이와 같이 예언자들은 분명히 미래의 일에 대해 예고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한 자기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예언자의 주된 임무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언한다"는 말을 "예견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보는 것을 잘못된 일이다. 물론 예언자들은 때로 미래의 일을 예견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주된 임무는 바로 그 당시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설교자들과도 같았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미래를 보여주실 때에만 미래의 일을 선포했던 것이다.    


  나. 특정한 개인들

  한 나라의 도덕적, 종교적 조건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지도력에 크게 의존한다. 만일 지도자들이 스스로 옳게 행하면 백성들도 그렇게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언 방법의 도 다른 면은 이스라엘의 특정 인물들과 접촉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왕의 경우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유다의 왕 아하스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한 징조를"(사 7:11) 구하도록 권고했다. 그때에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사 7:12)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에게 한 표적을 주면서(사 7:14), 앗수르의 침략의 위협에 대하여 그에게 말했다. 때로 왕은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던 당시의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그렇게 했다. 그는 과연 여호와께서 위기에 처한 그의 백성을 도우러 오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예레미야에게 두 사람을 보냈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우리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라!"(렘 21:2)고 요구했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응답은 시드기야가 결코 듣기를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렘 21:4-5).

  왕과 접촉했던 예언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사울에게는 사무엘이, 다윗에게는 나단과 갓이, 르호보암에게는 스마야가, 여로보암에게는 아히야와 "여호와의 사람"이, 아합에게는 엘리야와 미가야가, 여호람과 예후에게는 엘리사가, 아사에게는 아사랴와 하나니가, 여호사밧에게는 예후가, 요아스에게는 스가랴가, 아마샤에게는 이사야가, 그리고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에게는 예례미야가 갔다. 물론 이러한 특정인들과의 만남은 선포라기보다는 개인적 만남이었다. 전기 예언자들은 주로 이러한 만남에 주의를 기울였던 반면에, 후기 예언자들은 이러한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후기 예언자들은 대중과의 접촉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전기 예언자와 같이, 특별히 경우에는 개인적인 접촉도 하였다.


  
다. 상징적 행위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들은 그들이 전하기를 원했던 진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엘리사는 어느 날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에게 창문 밖으로 화살을 쏘라고 말했다. 왕이 그렇게 하자, 엘리사는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말을 했다.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왕하 13:17)." 엘리사는 계속해서 왕에게 화살을 취하여 땅을 치라고 말했다. 이에 왕은 화살을 취하여 땅을 세 번 쳤다. 그런데 이것이 선지자를 노하게 만들었다. 엘리사는 왕이 땅을 세 번만 쳤기 때문에, 그가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왕하 13:18-19). 여기에서 화살로 땅을 치는 것은 여호아하스가 그의 원수인 아람을 치는 횟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가 지중해 연안에서 아스돗을 칠 때에 이사야에게 그 몸에서 베를 풀고, 그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행위는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사 20:4)" 드러낼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사야의 상징적인 행동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과 동맹을 맺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취해진 행동이었다. 어느 날 예레미야는 질그릇을 가지고 힌놈 골짜기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 앞에서 질그릇을 깨뜨렸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렘 19:11)." 산산조각이 난 질그릇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상징들은 선지자의 메지시를 인상깊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또 다른 경우에 예레미야는 상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레갑 족속의 경우를 인용했다. 레갑 족속의 관습 중 하나는 포도주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성전에 데려다가 그들 앞에 포도주 항아리를 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레갑 족속들은 조상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들의 순종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레갑 족속은 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모델로 제시되었다. 에스겔 역시 그의 예언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징을 사용하였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반석 위에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 포위가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겔 4:1-3). 또 다른 경우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머리와 수염을 밀고, 그것들 중에서 약감은 태우고, 약간은 바람에 날려버렸다(겔 5:1-2).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불태움과 탈취와 흩어짐을 당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상징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호세아가 그의 아내 고맬과 혼인한 것일 것이다.어느 날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 여인과 혼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녀가 "음란한 여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호 1:2). 호세아는 고멜과 혼인하였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같이 그녀는 음란한 자녀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자녀들의 이름도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로 지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고,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을 상징하였다(호 1:4).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뜻)로서, 이는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였다(호 1:6).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을 의미하였다(호 1:9). 후에 고멜은 그녀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호 3:1-3). 이것은 호세아의 경험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순종하였다. 고메리 그에게로 돌아왔을 때에, 그는 그녀가 처음 그에게 왔을 때의 생활 방식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그녀는 그에게 불성실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해 불성실했다. 또하 고멜이 호세아를 떠나서 그녀의 다른 정부에게로 갔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거짓 신들을 추구했다. 또한 호세아가 그녀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고멜을 다시 그의 아내로 취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리셨다.
 

  라. 시각적 교훈들

  예언자들이 도입한 또 다른 문학적 수단은 시각을 통한 교훈이었는데, 예언자의 눈에 비친 어떤 물질이나 행위는 그의 마음에 한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진리를 더욱 강조해서 표현하기 위해서 그러한 물질이나 행위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러한 수단을 가장 많이 사용한 예언자일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렘 1;11)를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에게 "네가 잘 보았도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어로 살구 나무, 즉 "샤켇"은 동시에 "주의를 기울여 지킨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에레미야는 이처럼 어린 살구 나무 가지를 보았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말씀하신 바, 심판의 경고가 그 백성에게 임하도록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잠시 후에 예레미야는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다(렘 1:13-1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끓는 가마는 환난과 곤고를 의미하였다. 그것이 북에서 기울어진 것은 그 환난이 북으로부터 임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북쪽의 방향을 특별히 지적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실 바벨론이 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물론 바벨론은 팔레스타인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유프라테스 강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따라 가다가 북쪽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나 예루살렘에 이른다.

  예베미야는 또 베띠를 사용하는 시작적 교훈을 사용하였다(렘 13:1-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그것을 잠시 동안 허리에 띠었다가, 씻지 말고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고 말씀하셨다(렘 13:4). 예레미야가 그렇게 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 띠를 다시 찾아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가 다시 그 띠를 찾았을 때에 그것은 이미 썩어 있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렘 13:9)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유다가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며칠 동안 띠를 허리에 띠었다가 땅에 묻은 것은 유다 백성이 잠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가, 죄와 함께 땅에 묻힐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띠를 유프라테스 강에 가지고 간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유프라테스 강이 있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실 것을 상징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다시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그 띠를 가져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얼마 후에 바벨론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로 가셔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유프라테스 강이 예레미야가 단순히 띠를 묻고 다시 그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두 번이나 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인한다. 물론 그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지만-그 강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250마일을 가야한다-그 곳에 두 번씩이나 갔다는 사실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묻혀진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바로 이만큼 떨어진 곳으로 사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또 다른 시각적 교훈을 발견했다(렘 18:1-10). 그는 토기장이가 녹로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려서 더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토기장이가 깨진 그릇을 가지고 더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파멸된 이스라엘을 가지고 더 좋은 백성으로 만드실 권한이 잇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상징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장차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당시에 하나님의 눈에 깨진 그릇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유배 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신 후에 다시 더 좋은 그릇으로 만드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경우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전 앞에서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본 것이었다(렘 24:1-10). 그런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었다(렘 24:2). 좋은 무화과는 "처음 익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첫 번째 추수(6월 말경)에서 얻어진 것으로 가장 귀한 열매였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준 상징은 유배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그 상징이 제시되고 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예레미야가 무화과를 본 정확한 때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직후의 일이었다(주전 597년). 그 당시에는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 위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무화과는 이제 막 사로 잡혀간 자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로 잡혀간 자들을 좋은 열매로 여기셨기 때문에, 때가 이르면 그들을 다시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우고 허물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을 심고 뽑지 아니할 것이다(렘 24:6).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새로운 마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나쁜 무화과는 이스기야의 지도 라애 유대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잡혀간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그 곳에 남아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고 말거리가 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렘 24:9). 다시 말해서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는 그 땅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3-2. 사명

  가. 새로운 가르침에 의한 혁명이 아닌 개혁

  한 세대 전만 해도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후기 예언자들(성경을 기록한 예언자들)을 새로운 가르침에 의한 혁명가들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일신론과 윤리적인 요구와 관련되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한 자들로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경배자들에게 윤리적인 행위를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혁명가라기보다는 개혁자들로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예언자의 메시지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이스라엘의 가르침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최근의 입장은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과 훨씬 더 일치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윤리적인 유일신론을 주장하는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그 초창기 역사로부터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그 분이 윤리적인 분이라는 것을 믿어왔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전기 예언자들과 성경을 기록한 후기 예언자들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언자들의 주된 임무는 개혁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죄에서부터 돌이켜서 율법의 가르침으로 돌아서기를 원했다. 이러한 임무를 위해 후기 예언자들은 많은 청중들에게 말한 후에, 다시 그들의 메시지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기 예언자들은 주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말했다. 예언자들은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혁명가들이 아닌 이유는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믿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이미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며, 또한 처음부터 제사장들에 의해 가르쳐 진 것이었다.


  
나.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함

  개혁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 먼저몇 가지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a. 율법 그대로의 가르침이 아님
  예언자들은 율법을 그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제사장의 임무였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그 항목별로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종류의 가르침은 일정한 장소에서 배우는 자와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조건은 지정된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들만이 만족시킬 수 있었고,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예언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었다. 예언자들이 가르친 것은-그들이 기록한 예언서에서 나타나듯이-율법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것을 항목별로, 그리고 순서대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b. 율법의 관점에서의 개혁의 요구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예언자들의 임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도록 고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도록 격려했다. 이러한 점은 특히 후기 예언자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모스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암 4:1)." 또한 이사야도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있을진저!(사 10;2)" 또한 예언자들은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문제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호세아는 이렇게 말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고 외쳤으며, 미가도"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미 6:1)"라고 외쳤다.

  전기 예언자들도 역시 후기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가가 아닌 개혁자들이었다. 사무엘이 개혁자의 역할을 감당한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이때에 그는 엘리 제사장의 방탕한 집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엘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았다(삼상 3:1-18). 백성들을 개혁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그가 미스바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요청한 데서 절정을 이루었다(삼상 7:1-14).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개혁을 요구했으며(왕상 13;1-10), 하나님도 아사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셨다(대하 16:7-9). 또한 아합과 이세벨의 다스림과 관련하여 갈멜산에서 행한 엘리야의 행위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왕상 18장).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 전기 예언자들은 개인이나 몇몇 사람들을 향해 개혁을 부르짖었다.

  c. 율법에 대한 언급이 적음
  예언자들은 이러한 개혁의 메시지를 선포함에 있어서 율법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예언자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라고 권고할 때에 당연히 율법에 대해 언급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 예언자들이 율법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 지에 대해 의문이 일어난다. 아이히로트(Eichrodt)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언서에서 율법(토라)이 적게 언급된 것은 '종교 의식에 있어서의 죽은 형식주의와 기계적인 반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은 율법의 의식을 그 자체로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의식을 율법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러한 생각이 그들을 죽은 형식주의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자주 언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삶 속에 적용하는 문제를 더 강조했다.

  d. 율법 안에서의 묘사의 결여
  우리는 이미 예언자들이 율법 속에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사장들처럼 율례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유는 예언자들이 새로운 사상에 의한 혁명가들이라기 보다는 개혁가들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가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요구되었다. 백성들은 그들이 가야 할 정상적인 길을 떠났기 때문에, 다시 그 길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상태, 또는 그들이 행해야 할 상태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다. 율법은 백성들의 이상적인 상태를 위하여 제장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 속에서 제사장들에 의해서 율법을 배움으로 그것을 따를 수 있었다. 만일 백성들이 제사장이 가르친대로 율법을 따라 살았다면 그들에게 개혁가인 예언자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언자는 백성들이 정상적인 길에서 떠났을 때에 그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는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태에서의 율법 속에서 묘사하지 않았다. (신 18장)에서 묘사된 예언자에 대한 부분이 개혁가들의  역할보다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하는 자로서 묘사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다. 판단 파수꾼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중재

  예언자의 임무는 개혁 외에도 세 가지의 역할을 요구하였다. 이들 세 가지 역할은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구별되기 때문에 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행위에 대한 판단자
  첫째로 예언자의 역할은 백성들의 행위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렘 6:27)"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같이 굳게 서서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해야 했다. 그가 따랐던 기준은 물론 율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행하고 있는 지를 알기 위해서 예레미야의 판단을 의지해야 했다.

  * 영적 파수꾼
  둘째로 예언자의 역할은 백성들 중에서 파수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해야만 했다. 에스겔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하나님은 계속해서 선지자가 이러한 경고를 한 경우에는 백성들이 죄 가운데서 죽어도 선지자에게는 그 책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선지자가 이를 경고하지 않으면 그들의 피를 선지자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동일한 개념은 (겔 33:7)이후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에게 있어서 파수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예언자는 위기에 직면하여 이러한 경고를 해야만 했다. 만일 그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죄 속에서 죽어간다면, 적어도 그의 손은 그 죄로부터 깨끗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경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가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 영적 중재자
  셋째로 예언자의 역할은 중재자로서의 역할이었다. 물론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언자들 역시 의식 행위와는 별도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한 예언자들은 다음과 같다. 전기 예언자들 중에서는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해 예언하기 위해서 유다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곳에서 여로보암은 그 예언자의 말을 중지시키려고 하다가 그의 손이 말라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예언자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왕상 13:6)"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간청을 듣고 중재자 역할을 하여 그의 손이 다시 회복되게 하였다. 또한 엘리야도 이러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어느 날 사르밧의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중재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재를 들으시고 소년의 목숨을 돌이키심으로 그 어미에게 큰 기쁨을 주셨다(왕상 17:17-24). 수년 후에 엘리사는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수넴 여인의 어린 아들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수행했다. 소년이 죽게 되자, 그 모친은 즉시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는 그 모친의 집으로 가서 어린 아이를 위해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여 그 생명을 다시 살려서 그 모친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왕하 4;18-37).

  성경을 기록한 후기 예언자들 역시 백성들을 위해 여러 차례 중재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땅이 황충에 의해서 먹히게 되자, 하나님께 대해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암 7:2)" 본문은 계속해서 아모스의 중재의 결과로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아니하시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모스가 본 것과 같이 황충에 의해서 몰려올 재난이 그의 중재로 말미안아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다른 어느 예언자들 보다도 더 많은 중재자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에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내 눈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해 망함이라(렘 14;1)."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0-21)"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에레미야에게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지 말라고 요구하셨다. 예를 들면 (렘 7:16)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해 브르지저 구하지 말라! 내거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렘 11: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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