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고린도후서)

하나님과 바울 (1:1-11)

 

사도권 논쟁서론(1-7장)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8-9장)

거짓교사를 대적함(10-13장)

고린도후서의 내용 요약


Ⅰ. 왜 바울은 직접 오지 않고 편지를 썼는가? (고후 1:1-2:13)

  
바울이 중요한 선교적 노력을 기울인 고린도와 에베소는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고린도인들의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은 고린도에서 거절당하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에베소에서는 그의 사역을 반대하는 범도시적인 폭동이 일어나서 더 이상 안전하게 머물 수 없게 되었다. 한 곳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다른 한 곳에서는 위험에 처한 바울은 결국 마게도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나서 기쁨 속에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먼저 독자들에게 인사말을 전한 후에, 최근에 그가 겪은 어려움 가운데 자신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고린도를 근심 속에 방문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소개하고, 자신이 왜 고린도로 바로 가지 않고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1. 인사 (1:1-2)(지난 시간 공부)

2.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감사 (1:3-11) (지난 시간 공부)


3.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 (1:12-2:11)
 
1)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비판 (1:12-17)(지난 시간 공부)
 
2)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견고히 서라! (1:18-22)(지난 시간 공부)

 3) 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 (1:23-2:2)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23).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4)."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왜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걸고 맹세를 하고 있다. 바울은 가끔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다(롬 1:9; 빌 1:8; 살전 2:5,10 참조). 이러한 문구는 당시 헬라 문학에서 사용되던 저주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표현 방법은 구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맹세문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룻1:17; 삼상 14:44; 삼하 3:35). 여기에서 바울이 자신의 영혼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운 것은, 그가 하는 맹세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은 그들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은 이기심이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다. 바울은 직전에 고린도교회에 방문했다가 큰 어려움을 겼었다. 그러므로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바울이 다시 원래 계획대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다면 그는 또 다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었다(2:2-3). 이때에 고린도 교회에는 아직도 징계를 받을 만큼 바울을 근심하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2:5-7).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을 연기함으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사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기를 원했던 것이다(2:7). 바울은 매사에 목회자로서 인내심을 가지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고린도의 일부 교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인내와 배려를 알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바울을 비난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관한다'(퀴리유오멘)는 말은 '지배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lordover).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기가 복음을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된 사람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전 5:4-5, 고후 10:2-8, 딤전 1:20). 그는 사도의 권위로 고린도교인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잘못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태도로 그들을 대하지 않았다. 권위주의적인 지배는 거짓 교사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었다(고후 11:13-15).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자(또는 동역자)가 되길 원했다. 여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 대해서 사도적 권위를 갖기는 하지만(10:2-8; 고전 5:4,5; 딤전 1:20), 바울은 그들 스스로 신앙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그가 자기 육체적 이익을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2:1),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2:2)" 

  바울은 지난 번 고린도교회 방문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이 방문으로 인해서 큰 근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아직 바울에 대한 반대자가 활동하고 있고, 문제가 정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어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만일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원럐 예고한 대로 고린도교회 방문을 감행했다면, 그는 반대자들로 인해 근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을 징계하고 치리하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반대자들이 회개하고 문제가 정리될 때까지 부득불 고린도교회 방문을 연기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2:1).

  (2:2)에 대한 개정판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공동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의 열매로 낳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신뢰와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서로 기쁨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아직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래 계획대로 고린도 방문을 강행한다면, 그는 지금까지 저지른 그릇된 성도들의 잘못을 엄단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에 기쁨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지난 번처럼 근심의 교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문 계획을 변경함으로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 문제가 정리된후에 서로 기쁨으로 만나서 성도간의 교제를 누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모든 환경을 고려해서 자신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 최선의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신중하게 목회적인 배려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일부 비난자들의 말에 선동되지 않고, 교회가 빨리 정상화되어 성령 안에서 사도 일행들과 기쁨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2:3)."

  바울은 3절에서 자신이 이전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 "쓴 것은"으로 번역된 말(에그랖사)은 과거형으로 그가 과거에 쓴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이거나, 아니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보낸 편지로 알려진 '눈물의 (준엄한) 편지'일 것이다. 이 경우에 많은 학자들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 편지는 현존하지 않고 소실된 것으로, 바울이 가슴 아픈 방문을 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A.D.56년 봄에 디도를 통해 고린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는 대신에 아픈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마땅히 기쁨으로 만나야 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통해 근심을 하게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방문하는 대신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하여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로 결심을 했다. 바울이 씨를 뿌려 거둔 열매인 고린도 교인들은 당연히 바울에게 기쁨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관계가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바울에게 기쁨을 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형편이 되었다. 바울이 진정으로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순히 오해에서 비롯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 사도들에 현혹되어(11: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직접 방문하여 책망하고 문책하는 일이 피차에 마음만 상하게 할 뿐 근본적인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1:15-16) 취소하고, 그 대신에 '눈물의 편지'로 알려진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냄으로써 반대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다.


  여기에서 바울은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겪는 모든 희로애락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6-12). 지금은 관계가 악화되어 있지만 그래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는 확신을 표시하고 있다. 아마도 고린도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지만(5,6절;11:13) 대부분의 교인들은 건전했을 것이다(Barrett).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에 대해서 믿음과 신뢰를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 - 이것은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이유와 그때의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세오스'는 `압박', '괴로움'을 뜻하며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노케스'는 '억압', '고통', '고민'의 뜻이 있어 바울의 심정이 매우 심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이토록 깊은 심적 고통을 당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안에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반(反)바울적 논리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동조(同調)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2:4)."


  그는 편지를 쓸 때에 반대자들과 고린도교회 문제들로 인해서 큰 눌림과 걱정 속에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썼다. 우리말 성경에서 "눌림"으로 번역된 말(쓸립시스)은 고통과 괴로움을 의미하며, 걱정으로 번역된 말(쉬노케)는 비탄, 걱정, 고통 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바울은 사랑해야 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고 바로 잡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매우 큰 고통과 걱정과 비탄에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편지를 썼다. 바울이 겪은는 심적 고통과 아픔은 눈물로 쓴 편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가끔 눈물의 편지를 썼으며, 또 편지를 쓸 때에 눈물로 호소를 했다(빌 3:18; 행 20:19,31).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눈물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참도록 가르친 스토아의 학자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진정한 목자는 성도들을 책망하며 바로 잡을 때에 그 마음에 많은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되어 있다. 이는 그 책망이 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엄한 책망의 편지를 쓴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근심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눈물의 편지가 부분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7:8). 그러나 그것은 그 슬픔을 통해서 그릇된 부분을 바로 잡으려는 사랑과 충심에서 나온 것이지, 그들을 걱정하고 염려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그 편지를쓴 것은 오히려 "바울이 그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은 고린도교회의 그릇된 자들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사도의 권위로 그들을 제거하면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애정 어린 충고를 통해서 그들을 바로잡아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참된 충고와 책망은 진심 어린 사랑과 관심이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편지를 통해 전하는 자신의 사랑을 "넘치는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모는 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자녀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갖는 법이다. 바울은 이러한 영적 부모의 넘치는 사랑으로 그릇된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에 호소함으로, 그들이 회개하고 바로 돌아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었다(7:9).

                                ◎  토론할 문제  

1. 목회자가 교회에서 일부 성도들의 도전과 반대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에 대해서 바울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해보자.

2. 그릇된 일을 행한 사람들이 충고의 말을 수용할 준비가 안되었을 때에 교회는 그들을 기다려 주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들이 상처를 입더라도 그들을 만나서 과감하게 바로잡아주는 것이 옳은가?

3.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픈 마음으로 충고와 책망을 한 경험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보자. 사랑의 충고와 비난을 위한 책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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