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고린도전서)

제 2부 고린도교회에서 온 소식에 대한 답변 (1:10-6:20)


                    Ⅱ. 고린도 전서 내용 연구

1부 서론(1:1-9)

2부 교회 소식에 답함(1:10-6:20)

3부: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함(7-16장)

인사

감사

지혜와 분파문제에 대해

음행문제에 대해

결혼

우상제물

성령의 은사

부활

연보

(1:1-3)

(1:4-9)

(1:10-4:21)

(5-6장)

7장

8-11장

12-14장

15장

16장

고린도전서의 내용 분해


              1. 지혜와 분파에 대한 답변 (1:10-4:21)

 

 6) 복음의 선포자 (3:1-17)
 

  가.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 성도(3:1-4)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1).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2)."
 

  바울은 앞에서 영적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를 소개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영적인 사람처럼 대하지 못하고, 육적인 사람들, 즉 영적인 아기들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다(3:1). 바울은 여기에서 성도들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다. 바울이 분류한 첫째 사람은 “신령한 사람”, 즉 영적인 사람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좆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좆아 살고,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바울이 분류한 둘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다. 이 말은 원문에는 “육신을 재료로 만들어진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사람은 3절에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바울이 말하는 육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신의 사람”, 즉 영적인 아기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적인 존재들이라고 불렀는가?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복음을 믿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전파된 복음을 믿었으며, 성령을 좆아 살면 영적인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성령을 좆지 않고 육신을 좆아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인 아기들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영적인 초보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영적인 아기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밥같이 단단한 음식(십자가의 비밀에 대한 더 깊은 진리)을 먹이지 못하고, 젖과 같이 부드러운 음식(십자가의 핵심 내용만 간단히 요약함)만 먹일 수밖에 없었다(2).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4)"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탄식하고 있다(3).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좆지 않고 육신을 좆아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영적인 초보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온전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고에 익숙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받으면 즉시 온전한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성령보다는 육신을 좆아 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영적인 어린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그들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당파를 만들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좆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3:3).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그들이 좋아하는 사역자들에게 더 밀착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3:4).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바울에게 깊은 존경과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부모와 자녀들이 영적인 유대감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감이 지나쳐서 분파를 이룰 정도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결코 사람을 중심으로 나뉘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볼로 역시 바울의 후임으로 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다. 아볼로 역시 그리스도를 전했고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볼로가 복음을 전한 수사학적인 방법은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식 사고에 익숙해진 회중들에게 더 친근하고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보다 아볼로에게 더 친밀감을 가진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성도들은 바울을 좆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좆는 사람들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리 더 발전해서 그들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서 서로 시기하고 싸우는 것은 그들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후반부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신의 열매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시기와 분쟁을 육신의 열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열매 중에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시기와 분쟁은 육신을 중심, 자기중심으로 살 때에 일어난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지할 때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들이 육신을 좆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다.


 <토론 문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육신적인 교회인가? 아니면 영적인 교회인가? 외국 사람들이 한국 교회 왔을 때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국 교회의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한국 교회는 매우 열정적이다. 한국 교회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한다. 그 결과 다른 나라에는 없는 대형 교회들이 많이 있다. 둘째로 한국 교회는 수없이 분열하고 분쟁하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존재하며, 또 같은 교단 내에서도 분쟁이 많이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분쟁이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경쟁적으로 은사를 자랑하고 분당을 만들어서 서로 시기하고 다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신앙의 성숙도에서 영적인 자인가? 아니면 육신을 좆아 사는 육신적인 사람인가? 나는 성령을 좆아 사는가? 아니면 내 뜻과 능력을 의존하여 살아가는가? 나는 하나님보다 내가 가진 무엇을 자랑하거나 남을 멸시하고 있지는 아닌가? 나는 매주일 교회에 잘 나가고 헌금도 잘 드리고 또 기도도 잘하지만, 한 편으로는 남을 시기하고 헐뜯고 있지는 않은가? (다행히 최근에는 우리나라 교회에도 연합과 화합의 움직임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한국 교회가 육신보다 성령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복음선포자들의 책임 (3:1-15)

 가) 사역자는 하나님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

  바울은 분당을 나누어 다투는 일이 그릇됨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그는 “아볼로와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5).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추종하던 사람들, 즉 아볼로와 바울은 남에게 섬김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섬기는 자들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재능과 능력을 남에게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는 힘이나 재산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타락한 세상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육신에 속하여 세상의 사고방식을 좇아서 성령의 은사를 자랑거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은사들은 무시하고,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은사들, 즉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들을 사모했다(바울은 12-14장에서 이러한 그릇된 은사관을 교정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는 남에게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남을 섬기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아볼로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고 소개했다. 여기에 언급된 “사역자들”, 즉 디아코노이는 “종”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디아코노이는 원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하인들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다. 신약에는 종을 나타내는 둘로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철저히 주인의 소유가 된 노예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바울 서신에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모든 직분들을 가리켜서 “디아코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일은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에 매우 독특한 일이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관직을 지칭하는 말은 남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에 관직을 가리키는 말들은 주로 “아르케”(다스린다), “아르콘”(다스린다), “티메”(영광), 그리고 “텔로스”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다 남을 다스리고 섬김과 영광을 받는 것과 갚은 관계가 있는 말이었다. 바울 역시 유대인과 로마인들의 관직으로 지칭할 때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의 직분을 지칭할 때에는 결코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교회 안의 모든 직분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디아코니아”라는 말이다. 바울이 교회 직분을 디아코니아라고 부른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 교회의 모든 직분은 남을 다스리거나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섬기기 위한 것이다(그는 심지어 사도의 직분마저도 섬김을 위한 것으로 부르고 있다). 2) 교회의 모든 직분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높고 낮은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평적이며 남을 섬기기 위한 특성을 갖고 있다.


  바울도 아볼로도 복음을 전파하여 성도들을 믿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고후 4: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심을 전파하노라.” 한국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들을 종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목회자는 근본적으로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그 지위를 너무 높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존경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좇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은 좋은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섬김은 자원함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하며, 결코 강압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토론문제>

  교회에서의 직분들, 즉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실제로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직분을 섬김을 위한 것으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직분을 영광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교회의 당회는 섬김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큰 회사의 이사회처럼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를 향해서 교회 직분에 대한 개혁을 외쳤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개신교 안에도 직분의 권위 문제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섬기는 자로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직분을 여러 가지 섬김과 영광을 위한 자리로 만들어 놓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교회는 학위나, 시설, 가운 같은 형식적인 것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직자들이 성도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고, 예의 없게 대하는 일은 없는가? 미국에서는 목사나 정부의 장관들을 “미니스터”(종)라고 부른다(지금은 “세크리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기독교 정신이 정치에까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관직의 용어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는 이러한 관직의 변화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 식물(나무)의 비유 (6-9)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6),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7).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9)."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를 나무와 같은 식물로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과 다른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식물(나무)을 돌보기 위해서 부름 받은 일꾼으로,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식물(나무)을 자라게 하시는 농장 주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해 교회를 섬겼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개척의 은사를 가진 선교사로서 교회 개척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곳곳에서 자신이 복음의 개척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10절에서 자신을 교회의 터를 닦는 자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롬 15:20)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은 그가 교회 개척의 은사를 가진 사도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볼로는 바울과는 달랐다. 아볼로는 이미 세워진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교회를 섬겼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했고, 아볼로는 그의 후임으로 와서 성도들을 양육했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으로 교회를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은 나무를 심고 아볼로는 그 나무에 물을 주었지만, 그 나무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6). 그는 씨앗을 심는 자신이나 물을 준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그들을 자라게 하신 하나님이 중요한 분이라고 역설하고 있다(3:7). 복음의 씨를 심은 바울과 아볼로는 사역자로 서로의 일을 보충했다. 그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충성한 대로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될 것이다(3:8). 하나님은 바울과 아볼로를 통해서 교회를 성장시키셨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였다(3:9). 그러나 그들은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으로 나무를 위해서 일꾼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나무를 자라게 하신 분은 농장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점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람, 즉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게바를 중심으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다음 주 계속 - 

알림) 교재에 대한 문의나 제안 사항이 있으시면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