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고린도전서)

제 3부 고린도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변들 (7-16장)


                    Ⅱ. 고린도 전서 내용 연구
 

1부 서론(1:1-9)

2부 교회 소식을 듣고 답변함(1:10-6:20)

3부: 교회의 편지에 대해 답변함(7-16장)

인사

감사

분파문제에
대해

음행문제에
대해

결혼

우상제물

예배에
관하여

부활

연보

(1:1-3)

(1:4-9)

(1:10-4:21)

(5-6장)

7장

8-11:1

11:2-14장

15장

16장

고린도전서의 내용 분해

 



               3부: 교회의 편지에 대해 답변함(7-16장)

3. 예배에 관한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11:2-14장)


   바울은 (11:2-14:40)에서 다음과 같은 예배에 관한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1) 예배 시의 여자들의 복장(11:2-16)

 2) 성만찬의 올바른 거행(11:17-34)

 3)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12:1-14:40)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대답할 때에 사용하는 말, 즉 “...에 대하여는”이라는 말은 (고전 12:1)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11:2)을 보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머리에 너울을 쓰는 관행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글로에의 권속이나(고전 1:11 참고), 또는 스데바나, 브드이고, 아가이고를 통해서(고전 16:7 참고) 고린도교회의 성찬식 때에 있었던 무질서와 함께 여인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도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는 세 가지 문제(예배 시에 여인들의 복장문제, 성만찬의 무질서 문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무질서한 사용)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11:2-14:40)에서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적절한 교훈을 하고 있다.


예배 때 여인의 복장 문제

성만찬의 무질서 문제

성령의 은사 문제

11:2-11:16

11:17-11:34

12장-14:40

예배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 (11:2-14:40)

  



5.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12:1-14:40)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숙하지 못한 이해로(특히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한 무분별한 사용으로) 예배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세 번째 예배 문제였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 문제를 12장-14장에서 아주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앞에서 바울은 8-10장에서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룰 때에 9장에 신학적인 원리를 삽입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도 바울은 12-14장 사이에 있는 13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는 신학적인 원칙(사랑의 원칙)을 제시하고, 12,14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1)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1)
 
 "형제들이여! 성령의 것들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1)."


  바울은 12장을 "성령의 것들에 대하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이미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7:1 참고). 바울은 새로운 주제로 전환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너희가 꼭 알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중 부정형 표현은 바울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강조형 문장이다. 바울은 같은 말을 1절에서는 이중부정형으로, 그리고 3절에서는 긍정형으로 반복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며(1:5-8, 4:8), 예배 때에 그 은사들을 경쟁적으로 과시하여 예배 질서를 무너뜨렸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생생하게 1세기 중반의 교회의 예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다룰 때에(8:1-6), 먼저 신학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논증을 시작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다루면서 먼저 신학적인 원칙을 제시하면서 토론을 시작하고 있다(12:2-3). 바울은 2-3절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 분이신 성령께서 서도들에게 주시는 다양한 은사들(12:4-11)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한 몸에 있는 다양한 지체들을 통해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설명했다(12:12-23). 그리고 그는 중간에 있는 13장에서 사랑이 가장 고귀한 성령의 은사이며, 또한 모든 은사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14장에서 방언보다 앞서는 예언의 은사를 설명하면서, 예언의 은사도 질서있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 (12:2-3)

 

 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그릇된 기준(2) - 신비 체험 -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벙어리 우상들에 의해 휩쓸려갔느니라(2).”


  바울은 2절에서 그릇된 영적 분별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체험하거나, 황홀경을 체험하는 것을 성령의 현상이나 성령의 체험으로 생각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신비스러운 황홀경 상태에서 하는 방언이나 예언을 성령의 특별한 나타남과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다투어 방언과 예언을 하는 바람에 교회의 예배가 혼돈에 빠지곤 했다. 이것은 고린도를 포함한 전체 헬라 세계에서 신의 영이 일으킨다는 황홀 상태를 높이 평가하고, 황홀경에 빠진 상태에서 디오니소스와 같은 신에게 예배를 하던 전통이 반영된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방인이 섬기는 신은 인간이 나무와 돌을 가지고 깎거나 쪼아서 만든 것으로, 생명이 없고 소리도 못내는 “벙어리 우상들”(합 2:18, 시 115:5,7, 사 46:7 참고)이었다.


  고린도인들은 과거에 이러한 신에 의해 도취되어 열광에 빠지곤 했다. 그때에 귀신들이 인간의 우상숭배 심리를 이용하여 그들을 황홀경에 빠뜨리고, 혼돈과 죄악을 조장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다 성령의 체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모두 성령의 체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이러한 신비적인 체험이 모두 다 성령의 역사와 체험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도 방언과 귀신을 쫓아내거나 신비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무당들도 접신을 하게 되면 황홀경에 빠져서 춤을 추고 환상을 보며 귀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비한 체험을 모두 성령의 역사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참된 기준(3): -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을 고백하고 인정함 -

  "나는 너희가 이것을 알기를 원하노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면서 ‘예수에게 저주가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고 할 수 없다(3)."


  바울은 2절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그릇된 기준을 제시한 후에, 3절에서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올바른 원칙, 즉 신학적인 원칙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기준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분명하게 알기를 원했다. 바울이 제시한 성령의 역사의 올바른 기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 가장 먼저 하기 시작한 신앙 고백이며, 또한 복음 선포의 형식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대행자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 110:1)에 예언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고 자신의 주권을 대행케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신앙 고백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 고백이며,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형식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의 기준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고백하도록 만드신다. 이 고백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매달려 처형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시고, 만유의 주님으로 높여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죄와 사단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이전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골 1:13). 이러한 고백은 결코 세상의 지혜로는 할 수가 없다(고전 1-3장). 과연 어떤 사람이 로마 병정에 의해 정죄 받고 가장 극악한 십자가형에 처한 사형수를 온 세상과 온 인류를 다스리는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이러한 정치적 패배자에게 무릎을 꿇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겠는가? 이러한 고백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여기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예수에게 저주가 있으라!'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가? 어떤 주석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린도에서도 제국 또는 그 도시의 관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버릴 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린 표시로 "예수에게 저주가 있으라!"고 고백하도록 강요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박해 중에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일단 저주 선언을 하고 나서, 후에 교회에 돌아와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고 변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예수에게 저주를 선언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행위뿐 아니라, 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는 행동들(자기주장, 갈등 조장, 혼돈 등)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롬 8:9-17, 갈 4:6).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체험하게 하며, 또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그 뜻에 순종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는 예수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모든 말과 행위(예수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신비스럽고 황홀한 체험을 수반한다고 해도)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가 없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의의 길과 다른 행위와, 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과 상반되는 어떤 사상이나 가치나 행위도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항상 의와 사랑, 화평과 해방, 그리고 치유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 결코 죄악이나 증오, 갈등, 억압, 상처 주는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법이 없다(갈 5:16-26). 의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시며,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에게 죄악을 행하도록 명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성령을 빙자해서 예수님의 주권에 반하는 죄악을 저지르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불의한 일을 시키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황홀경이나 방언, 환상, 이적 등과 같은 현상을 동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체험은 이방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진정한 성령의 역사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역사의 진정한 표시는 바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라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분별할 때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식하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해서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 갈 5:22-23)를 맺고 있는지 아닌 지를 살펴보면 된다. 만일 그 사람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뜻과 다른 악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은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령은 윤리의 영이지 마술이나 마력의 영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곳에는 항상 믿음과 사랑과 의가 나타나며, 결코 반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 또 다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준 -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 -
   바울은 (롬 8:14-17, 갈 4:4-6)에서 성령의 역사의 기준이 되는 또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또 그 아빠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진정한 성령의 역사의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막 14:36, 눅 11:2).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성령,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1)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2) 하나님의 뜻(주권)을 존중하고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눅 11:2-41, 마 6:9-13)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 나라(통치)와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성령,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아빠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롬 8:14-17, 갈 5:16-25). 그런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지금 아빠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그 분을 의지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볼 때에, 바울이 성령의 역사의 기준으로 제시한 두 가지 기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라. 방언이나 신비한 체험이 성령의 역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지금도 일부 교단이나 신비를 강조하는 일부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증거를 방언, 예언, 환상 등과 같은 신비한 체험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성도들이라도, 신비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는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본문과 (롬 8:14-17, 갈 4:4-6)에서 성령을 받은 표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함
2)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순종함
3) 성령의 인도를 좇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음.

  그러므로 방언, 예언,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신비한 체험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성도들이 방언, 예언,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하지 못해도,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을 고백하고, 그 분을 의지하며 순종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고있다면, 우리는 그가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의 인도를 좇아서 살고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바울은 방언, 예언,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부인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12-14장에서 바울이 이러한 영적 은사들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 지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 토론할 문제들 ◎

1. 바울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는가? 

2.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그릇된 기준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3.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는지 설명해보자.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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