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고린도전서)

제 3부 고린도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변들 (7-16장)


                    Ⅱ. 고린도 전서 내용 연구
 

1부 서론(1:1-9)

2부 교회 소식을 듣고 답변함(1:10-6:20)

3부: 교회의 편지에 대해 답변함(7-16장)

인사

감사

분파문제에
대해

음행문제에
대해

결혼

우상제물

성령의
은사

부활

연보

(1:1-3)

(1:4-9)

(1:10-4:21)

(5-6장)

7장

8-11장

12-14장

15장

16장

고린도전서의 내용 분해


               3부: 교회의 편지에 대해 답변함(7-16장)

2.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의 답변(8:1-11:1)


  고린도전서의 제 3부인 (고전 8:1-11:1)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8장     : 각자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형제를 위해서 자유를 절제할 것.

9장     : 자유를 절제하는 일에 대한 바울의 예.

10:1-22 :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가 우상숭배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

10:23-33: 우상 제물에 대한 바울의 입장 정리.

11:1    : 결론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고전 8:1-6)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고전 8:7-13)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바울의 모범(9:1-27): 사랑과 희생으로 사도직을 수행함.


  우리가 앞에서 미리 언급한 것처럼 (고전 8:1-11:1)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바울의 답변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9장을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바울이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자비량 선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은 8장과 10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 사랑으로 처신하도록 권면을 하는 동시에, 9장에서는 자신의 경우를 그 사례로 들면서 사랑과 희생으로 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바울의 서신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하게 될 (고전 11:2-14장)도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다. 바울은 11장과 14장에서 영적인 은사를 사랑으로 행할 것을 권면하고, 그 사이에 있는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고전 9장)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고전 9:1-27)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진정한 사도임을 변호함(1-2).

2. 자신이 사도로서 생계비를 받아 살 권리가 있음을 주장함(3-15).

3. 자신이 생계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하는 것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자발적인 행동임을 설명함(16-18)

4.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권리를 포기함(19-23).

5. 사랑과 희생의 사도직 수행을 통해 10장에서 강한 자들에게 권면할 준비를 함(24-27).



 
1) 바울이 자신이 진정한 사도님을 주장함(1-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주 안에서 내가 한 일의 열매가 아니냐?(1)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니라(2)."


  바울은 1절에서 강력한 4가지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들은 모두 다 'ouk'라는 부정어(not)를 사용하고 있다. 헬라어 문법에 따르면 이러한 부정어로 시작되는 질문은 모 두 다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위의 네 가지 질문은 모두 다 “그렇다!”는 답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고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은 앞에서 말한대로 “그렇다!”는 답변이 나오도록 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릴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 이 질문 역시 “그렇다!”는 답변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밝힌 12 사도의 자격은 1)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분이 하신 일을 목격하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2)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그 분의 증인이 될 수 있어야 했다(행 1:21-26). 이런 기준에 따르면 바울은 사도가 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또한 그가 전하는 복음은 형식적 측면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약간 달랐고, 그 강조점도 달랐다. 이 이로 인해서 바울은 종종 그의 사도권을 도전받는 일이 발생했다(갈 1-2장, 고전 15:8-11, 고후 2-6장, 10-13장 참조).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임받았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과 네 번째 질문은 모두 그가 그리스도의 정당한 사도임을 증명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그는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묻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그렇다!”이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란 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권대사로 파송하여 복음을 선포하여 믿는 자에게 구원을 받게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도 12 사도 외에도 사도라 불리어진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5:5의 “12”과 15:7에 나오는 “모든 사도”를 비교하라!, 그리고 (롬 16:7)에 나오는 ‘안드로니고’와 ‘유나야’ 참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직접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이방인의 사도로 위임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정한 사도임이 분명했다. 또한 바울은 한 가지 질문을 더 추가함으로 자신의 사도성을 더욱 더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주 안에서 내가 한 일의 열매가 아니냐?(1)”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위임을 받고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으며, 그의 사역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였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야말로 바울이 사도임을 증거 하는 명백한 증거임이 분명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신이 사도임을 증거하는 ‘도장“이며, 또한 ’추천서‘라고 강조했다(고후 3:2-3). 만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바울의 사도성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바울이 사도로서 전해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고린도교회 만은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니라(2).”



 2) 바울이 사도로 생계비를 받아 살 권리가 있음을 주장함(3-15).


  "나를 조사하겠다는 자들에게 줄 나의 답변은 이것이다(3)."


  바울은 3절에서 “나를 조사하겠다는 자들에게 줄 나의 답변은 이것이라!(3)”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여기에서 “자신을 조사하겠다는 자들”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의 사도성을 조사해보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반대한 자들은 “열광주의자들”이었다(고후 10-13장).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자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게바파, 또는 약한 자들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학자들은 (고전 12-14장)에 나오는 은사주의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 체험을 통해서 이미 하늘나라에 도달하여 천사처럼 되었다고 생각했다(4:8, 13:1). 고든 피(Gordon Fee)는 이 방언파, 즉 성령 열광주의자들이 바울의 영성에 시비를 걸어 그의 사도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내가 누구보다 더 많이 방언을 하지만 교회에서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게바파라는 주장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시비를 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는 없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4)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5)"


  바울은 4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4)”고 묻고 있다. 이 질문 역시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의미하고, 먹고 마실 권리는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아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과 바나바 역시 사도로서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아 생활할 권한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바울은 5절에서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5)”고 묻고 있다.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도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 그리고 게바와 같이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가족을 부양할 사례비를 교회로부터 받을 권한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사도들과 바울과 바나바 외에도 복음 사역에 전적으로 동참한 “다른 형제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6)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


  바울과 바나바는 가족 부양의 권리는 물론, 자신들이 먹고 입을 것을 받는 권리조차 포기하고 스스로 생계비를 벌어가면서 복음을 전했다(살전 2:9, 고후 11:7, 행 18:3, 20:33 참고). 당시에 헬라 상류층들은 육체노동을 노예나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시민들이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천시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육체노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사도로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6). 바울은 7절에서 사도가 마땅히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비유, 즉 군인, 포도원, 농부, 목동 등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누가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면서 군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따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 직업 군인이 나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농장에 포도를 심은 사람이 그 포도를 따먹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며, 양을 기르는 사람이 그 양떼의 젖을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7). 이와 같이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8)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9)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10).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1)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12)."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일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일이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므로 바울은 계속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8). 바울은 (신 25:4)을 보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밭에서 소가 일하다가 배가 고파서 곡식을 먹어도 이를 막지 말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 말을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는 밭에서 밭을 가는 사람들이나 타작하는 사람들은 그 곡식 중에 일부를 얻을 소망을 갖고 일을 한다고 말한다. 밭을 갈고 곡식을 타작하는 일꾼들은 일하는 중에 식사와 음로를 제공받고, 또 일을 마친 후에는 주인이 임금으로 그 곡식 중에 일부를 준다. 세상에 자기가 먹을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임금도 받지 않고 일하는 일꾼은 없다(9-10). 바울은 이 말을 자신과 바나바에게 적용하고 있다. 바울 역시 하나님 나라의 밭을 위해서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동안 맡은 바 복음 전파의 사역을 최선을 다해서 행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귀중한 영혼의 열매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 고린도교회도 생겨나게 되었다. 바울의 수고로 생겨난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울이 자기가 세운 개척 교회에서 다른 사도처럼 생활비를 요구했다고 , 그 일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11). 한 편 일부 선교사들이 와서 고린도교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고린도교회와 아무 관계도 없는 선교사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면,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그와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지장을 받지 않게 하려고 헬라인들이 천히 여기는 고된 육체노동을 감수하면서 사도직을 감당하고 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13)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선포하는 자들은 복음으로부터 생계를 얻도록 명령하셨다(14)."


  바울은 13절에서 다시 한 번 복음 선포자들이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성전에서 일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음식을 제공받았다. 율법에는 제사장들이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에 제사장에게 주는 몫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민 18:8-31, 신 18장).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에 관한 규례지만, 이러한 원리는 바울이 세운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었다. 그 동안 해왔던 바울의 논증은 14절에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바울은 (눅 10:7)과 (마 10:10)에 있는 예수님의 명령을 인용하고 있다.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들이 복음을 통해서 생계를 제공받도록 명령하셨다.” 이러한 명백한 주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명령에 따라서 게바와 다른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으면서 사도직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죽은 편이 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이다(15)."


  그러나 바울은 예수께서 명령하신 당연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태도를 보고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한 또 다른 예를 들고 있다. (고전 7:10,15)을 보면 예수께서 이혼을 금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불신자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경우도 바울이 역사적인 예수를 무시한 사례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해당 성경 본문을 피상적으로 연구한 데서 나온 그릇된 결론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정신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복음 전파자에게 생계비를 제공하도록 지시한 것은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다(마 10:10, 눅 10:7).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그들이 필요한 재정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소비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나사로 집안, 그리고 (눅 9장)에 나오는 헤롯 궁정의 고간부인들은 모두 큰 부자들이었다. 그러나 상류층에 속했던 그들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상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노예도 이동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와 재정적인 자립이 가능한 중산층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게 하셨다. 후에 주님은 그들을 각 지역에 보내시면서 각 마을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지하는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서 그들이 그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복음 전파자가 복음으로부터 생계비를 지급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새로운 사제라는 계급을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한 고린도나 데살로니가와 같은 헬라 도시의 상황은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나 사마리아와 매우 달랐다. 당시 헬라 세계에는 스토아 철학자, 냉소주의 철학자, 궤변가 등이 지혜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돈을 받아서 세계를 유지하고 이 곳 저 곳으로 유랑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에 바로 고린도와 데살로니가 같은 부유한 항구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 사람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다면, 바울 일행은 철학 교사와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철학 교사들이 말하는 세상의 지혜와 차별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효과 있게 전하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생활비를 벌어가면서 무료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바울은 천막 제조를 통해서 재정을 채워가면서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여 세상 철학과 차별화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그 곳에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을 거절한 것은 효과적인 복은 전파 때문이었지, 그가 예수님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는 헬라 되에서 바울이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스스로 생계비를 번 것은 예수님의 명령의 정신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위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가 하나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 또는 예수님의 며령을 실천할 때에, 그 말씀이 가진 의도와 정신을 살려서 순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고 그것을 문자에만 매달리면 그 말씀의 근본정신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근본주의와 율법주의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고후 3:6)에서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고, 그 영(정신)은 생명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이다. 바울은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었다. 그는 원래의 의도와 정신을 살리지 못하는 문자주의를 따르지 않았다. 문자와 정신이 대립하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것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문자보다는 그것을 말한 원래의 의도와 정신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해서 문자주의에 머무르게 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정신을 놓치고 형식을 강조하는 오류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성경을 해석할 때에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성령님께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토론할 문제들
 

1. 목회자와 선교사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어떤 점을 고려해서 결정되어야 하는가? 생활비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시골 교회의 목회자와, 지나치게 많은 재정을 지원받는 일부 교회의 목회자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2. 오늘날에도 바울처럼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자비량 선교를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면 그 예를 들어보자.


3.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바울처럼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겸손히 일하는 목회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성도들을 압도하는 사람은 대접받고 있지는 않은가?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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