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고린도전서)

제 2부 고린도교회에서 온 소식에 대한 답변 (1:10-6:20)


                    Ⅱ. 고린도 전서 내용 연구
 

1부 서론(1:1-9)

2부 교회 소식에 답함(1:10-6:20)

3부: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함(7-16장)

인사

감사

지혜와 분파문제에 대해

음행문제에 대해

결혼

우상제물

성령의 은사

부활

연보

(1:1-3)

(1:4-9)

(1:10-4:21)

(5-6장)

7장

8-11장

12-14장

15장

16장

고린도전서의 내용 분해


         2. 교회의 거룩함-음행 문제에 대한 답변(5-6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대한 소식을 듣고 편지를 통해서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교정하려고 했다. 원래 바울은 (고전 4장)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파송된 대표단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들 중에는 스테파나, 부두나도, 그리고 아가이고와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전 16:17). 그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바울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를 주장하면서 음행을 저질렀고, 교회의 분쟁도 더 심화되어 세상 법정에 고소했다고 전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듣고 나서, 그 문제들(음행, 우상제물, 성령의 은사 등)에 대한 답변을 추가하게 되었다. 이때에 바울이 답변한 내용은 (고전 5장)이후에 등장하고 있다.
 (고전 5:1-6:20)은 고린도전서의 제 2부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1-4장은 제 2부의 첫째 부분으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과 분열된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진정한 지혜와 화해의 정신을 전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제 2부의 두 번째 부분(5:1-6:21)은 “도덕적인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그릇된 성도들을 교정하기 위해 쓰여졌다. 제 2부의 첫 번째 부분에서 바울이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했다면, 제 2부의 두 번째 부분에서 바울은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고 있다.


1) 음행과 교회 (5:1-13)

 
가. 음행자에 대한 책망(5:1-5)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1).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2)”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성도 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계모를 데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바울은 그 말을 듣고 이런 일은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일이라고 책망했다. 1절에서 “심지어”로 번역된 말은 “사실은”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일어난 음행 사건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일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도덕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은 성령으로 온전케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고 주장했지만, 이방인보다 더 타락한 삶을 살았다. 바울이 여기에서 남자만 추궁한 것을 보면, 음행의 대상인 여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음행에 대해서 음행 당사자뿐 아니라, 그를 방치해둔 교회 전체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교만해져서(헛바람이 잔뜩 들어서) 큰소리쳤지만 부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교만해져서 이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다(2).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추궁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도덕적 타락은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부패한 육신에서 벗어나 온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육신은 본질적으로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행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들은 여러 가지 부패한 일을 행했다. 아마도 음행을 한 당사자는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신앙의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를 치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자랑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2)"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3).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4),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넘겨주라!)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5)."

  바울은 자신이 직접 범죄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도덕적 자유를 주장하며 음행하는 자들의 행위가 그릇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3). 그는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로서 음행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이 기도하며 묵상 하는 중에 음행자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바울의 뜻을 참고해서 온 교회가 음행자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촉구했다. 바울은 독단적인 결정을 하기 보다는, 온 교회가 함께 모여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를 원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악행자를 사단에게 넘겨주라고 명했다. 그러면 여기에서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어떻게 교회가 음행자를 사단에게 넘겨줄 수 있는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단의 통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다. 바울은 (골 1:13)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교회는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로 들어온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에서 다시 사단의 영역으로 가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악행자를 사단에게 내어 준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이 말은 범죄자가 교회의 치리를 받으면 그가 받았던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분명히 범죄를 하고 교회의 징계를 받은 사람이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게된다고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고 성령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성령은 종말에 완성될 구원에 대해 보증금으로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의 구원은 이미 확정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범죄하고 교회의 징계를 받기는 해도, 마지막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의 치리의 목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치리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 그러면 육신은 멸하고 영은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육신은 죽이고 영만 살린다는 말인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바울은 앞에서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집, 즉 성령을 좇아 산 사람은 마지막 날에 그 공역이 그대로 남아서 영생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집, 즉 육신을 좆아 산 사람은 심판의 날에 모두 불에 타버려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지금 그 원리를 행음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는 세상에서 육신을 좇아 죄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므로 그가 행한 모든 행위는 심판 날에 모두 불에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불 가운데서 얻은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어려운 점에 부딪치게 된다. 첫째는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육신과 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후에 중대한 죄를 짓고 교회의 징계를 받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첫째 문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육신과 영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앞으로 성경적인 육과 영혼관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어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룰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저자들조차 이러한 용어들에 대해서 통일되게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간단히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좀 도 시간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핵심만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다. 헬라인들은 이원론적인 사고에 의해 인간을 이분법으로 보았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은 영으로  보고, 영이 아닌 다른 요소들을 육신으로 보았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몸을 육신으로, 그리고 우리의 의식과 생각하는 부분을,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서 온 영으로 보았다. 그들은 인간을 통합된 존재로 보지 않고, 본질적인 영과 부정한 육신으로 구분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러한 헬라적 이원론에 빠져서 죄를 짓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 영혼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육신은 원래 부정해서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선해지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차피 썩어질 육신으로는 어떤 행동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음행을 행했고, 고린도 교회는 그들을 책망하는 대신, 그들을 자유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참된 인간론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을 두 개의 다른 요소의 연합(분석적 접근)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하나의 통합된 존재(종합적 접근)로 보았다. 그는 눈에 보이는 육신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요소도 육신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 생각하고 의지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영역에 속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인간은 연약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가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것을 육신으로 보았다. 그는 육신을 눈에 보이는 살덩어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존재양식을 육신으로 보았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영은 육신과 반대되는 성향, 즉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가려는 모든 요소였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육신을 좇는 육신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육신적인 삶을 살면 육신의 열매, 즉 자만, 자족, 불순종, 음행, 교만 등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을 좇아 살면 성령의 열매, 즉 사랑, 희락, 화평...등을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문에 나오는 음행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육신을 좇아서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치리함으로 사단에게 넘겨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기를 거부하고 사단을 좇아 육신의 열매를 맺고 살기를 고집했기 때문에, 사단을 좇아 살면서 육신, 즉 사망의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가 육신을 좇아 산 모든 것들을 심판의 불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구원의 불변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한 번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믿은 사람은 그의 잘못으로 인해 구원이 무효 되는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옛 아담 안에서 육신을 좇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덮고도 남는다(롬 5:15).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 그러므로 한 때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을 받아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 중간에 실수를 해도 그 구원이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 역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고, 이기심과 탐욕을 좇으며 육신의 열매를 맺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것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신실하게 대해 주신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확실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정론의 기초가 된다.



 
나. 교회의 거룩성(6-9)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


  바울의 관심은 첫째로 음행자의 심판에 대한 것이지만, 그는 동시에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공동체적 성격이 있어서 일부 사람들이 부정해지면 그 공동체 전체가 부정해졌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는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만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일정 기간 동안 공동체에서 축출했으며, 심각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율법은 이러한 징계를 통해서 공동체를 정결케 유지했으며,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바울은 이러한 점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하지 않고 자랑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적은 누룩(한 사람의 부정한 죄)이 온 반죽 덩어리(교회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죄로 묻들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했다. 바울은 이와 똑같은 격언을 (갈 5:9)에서도 사용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7)."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7).” 이 구절의 번역은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새 반죽 덩어리가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쓸어 내어버리자. 사실 너희는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자들이므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으므로...” 이 말을 우리 말 순서대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너희는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자들이며, 또한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도다. 그러므로 새 반죽 덩어리가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쓸어 내버리자!” 이러한 묘사는 바울이 이 편지를 유월절을 앞두고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게 만든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고 한다”고 밝혔다(고전 16:8).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바울은 유월절을 앞둔 시점에서 오순절까지 그 곳에 머물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유월절을 앞 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유월절과 깊은 관계가 있는 누룩에 관한 격언을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교훈했다. (출 12:15,19: 13:7)을 보면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누룩 없는 떡(무교병)을 먹어야 했다. 그들은 유월절 잔치가 시작되기 전에, 한 해 동안 집에서 사용했던 모든 누룩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교절 기간 동안에 누룩을 넣지 않은 순수한 떡을 먹었다. 이러한 행동은 지난 해의 모든 악행을 회개하고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은 이러한 관습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모든 묵은 죄를 제거하고 정결하게 되기를 원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서 “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반죽”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죄 없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결한 새 반죽덩어리가 되기 위해서 징계를 통해서 음행한 자를 제거해야 했다. 


   바울은 여기에서 서술형(누룩에 부풀리지 않은 자이며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과 명령형(묵은 누룩을 쓸어 내버리라!)을 조합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형과 명령형의 조합은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구조이다(골 3:1-9, 갈 5장, 롬 6장 참고)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서술형)-위의 것을 찾으라!(명령형)(골 3:1)"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명령형)-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서술형)(골 3:2-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서술형)-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명령형)(갈 5:1)"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서술형)-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명령형)(롬 6:10-11)"

  

  바울은 본문에서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누룩 없는 새 반죽(죄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이 되어(속죄 제물이 되어) 희생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누룩 없는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유월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잡아먹었던 유월절 양을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보았다. 또한 그는 유월절 예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성도들이 행하는 성만찬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8).” 그는 여기에서 유월절(또는 성만찬)을 지킬 때에 묵은 누룩과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음행자, 또는 죄와 죄의 습성)을 제거하고, 누룩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떡으로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유월절(성만찬)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고린도 교회가 먼저 음행과 같은 부정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고린도 교회에 만연된 죄를 제거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그러므로 그는 유월절의 영적인 의미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음행자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 1>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성적 타락과 인신매매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교회 안에는 성적 타락뿐 아니라, 일반적인 윤리적인 타락 문제도 크게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온전한 치리가 시행되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치리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의 타락자들과 교회 밖의 타락자들을 어떻게 다르게 대해야 하는가? 바울은 교회 내의 행악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교회 밖에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허락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이와 정반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게 대하는 반면, 교회 밖의 죄악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정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온갖 도적적인 부패가 만연한 한국 교회에서 어떻게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 2>

  바울은 범죄한 사람이 교회의 치리를 받기는 하지만, 그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신실하게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져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을 보면 이와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나온다. 히브리서 기자는 두 번째 배교자에 대해서 구원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구원에 대해 격려와 경고를 동시에 하고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구원의 은혜성만 강조하게 되는 경우에, 성도들이 방자해져서 방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면 은혜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히브리서의 경고 역시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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