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경 핵심 공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사도행전)

사도행전 제 3부: 이방인 선교(13:1-21:17)


                  제 3부 : 이방인 선교 (13:1-21:17)

  
이제 누가의 기사는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하고 있다. 이제 복음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를 넘어서서 땅끝까지 전파될 때가 되었다. 그 동안 전도자들의 전도 사역은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복음 전도자들의 시야는 땅끝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미 두 명의 집사들(빌립, 스데반)이 이 길을 준비해왔다. 스데반은 순교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빌립은 사마리아 전도와 이방인 내시 전도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열었다.

  이방인 선교는
두 가지 사건에 의해 미리 예고되었다. 첫째 사건은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 될 사울의 회심이고, 둘째 사건은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이 구원받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 후에 무명의 전도자들이 안디옥에 가서 그 곳에 있는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그들의 사역 범위가 팔레스타인수리아 본토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해외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비젼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해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전도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사울바나바였다.

  (행 13:1-21:17)에는 3차에 걸친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차 선교 여행과 제 2차 여행 사이에는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종교 회의가 소개되고 있다. 이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제1차 선교여행(행 13:3-14:28)
B. 예루살렘 종교회의(행 15:1-39) 
C. 제2차 선교여행(행15:40-18:22)
D. 제3차 선교여행(행18:23-21:17)

1차 선교여행

예루살렘 종교회의

2차 선교 여행

3차 선교 여행

(행 13:3-14:28)

(행 15:1-35)

(행15:36-18:22)

(행18:23-21:17)

이방인 선교 (13:1-21:17)


3. 제 3차 선교 여행 (18:23-21:17) (사도바울의 3차 선교 여행 지도보기)

  우리는 그 동안 사도 바울의 1-2차 선교 여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인 3차 선교 여행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사도 바울의 제 3차 선교 여행의 여정에는 다음과 같은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 제부터 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3-1. 에베소에서(18:23-19:41)
3-2. 북부와 남부 헬라에서(20:1-6)
3-3. 드로아에서(20:7-12)
3-4. 밀레도까지의 항해(20:13-16)
3-5.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연설(20:17-38)
3-6. 귀환: 예루살렘으로(21:1-17)

아볼로와 에베소

에베소를 향하여

북부/남부 헬라에서

드로아

밀레도를 향하여

에베소에서의 설교

귀환:예루살렘으로

18:23-28

19:1-41

20:1-6

20:7-12

20:13-16

20:17-38

21:1-17

2차 선교 여행(15:36-18:22)

3-1. 에베소에서(18:24-19:41)

 가. 갈라디아와 부르기아(18:23)

 "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23)."

  
바울은 안디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로 인해 불타고 있었다. 그는 그 곳을 떠나 다시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은 그가 처음에 전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을 비롯하여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지역들을 두루 다니면서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전도는 씨를 뿌리며 심는 것이고, 심방은 돋아난 싹에게 물을 주며 보살피는 것이다. 전도도 필요하고 심방도 필요하다. 목회에는 이 양면, 즉 전도와 양육의 두 측면이 있다.


 나. 아볼로와 에베소 (18:24-28)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24).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25).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6).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27),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28)."

  
아볼로라 하는 한 유대인이 에베소에 왔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당시 애굽의 수도이었고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이었다. 그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주전 3세기에는 거기에서 구약성경의 70인 헬라어역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곳에 필로라고 하는 유명한 헬라파 유대인 철학자가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며 공부를 했고 성경을 배웠다.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를 배웠다. '일찍'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내려오신 오순절 이전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주의 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배웠고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 그는 예수님의 교훈들과 행위들에 대해 많이 알았던 것 같고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가르쳤다.

  그러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요한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와 대조되는 말일 것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했다(마 3:11).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5). 아볼로는 아직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바로 듣지 못했던 것 같고 성령을 받지 못했다. 그는 성령께서 그의 속에 거하심과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오순절 이전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했으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그에게 공적으로가 아니고 사적으로 복음을 더 자세히 설명해준 것이다. 그 내용은 그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 내용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의미,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 그의 피로 죄사함 받음과 의롭다 하심 얻음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은 자이었으나 천막 만드는 자들인 아굴라 부부에게 겸손히 진리를 배웠다. 기독교 신앙 지식은 세상 지식이 많고 적음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아볼로는 아굴라 부부를 통해 아마 성령의 오심과 역사하심을 체험했을 것이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 즉 고린도로 건너가고자 했을 때 에베소에 있는 형제들은 그 곳의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하였다. 아볼로는 그 곳에 가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들의 말을 이김으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본문은 믿는 자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로 나올 수 없고 그를 진심으로 믿을 수 없다(요 6:44).



 
나. 에베소에서의 바울(19:1-41)
 
 
가) 바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1),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2).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3).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4),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5),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6),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7)."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한 후(행 18:23)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에베소에 왔다. 그는 전에 거기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했었다(행 18:21). 거기에서 그는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 '제자'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바울의 짧은 전도나 아볼로의 가르침 혹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전도로 믿은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 사도 시대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갈 3:2). 성령을 받는 것은 신약 성도의 특권이며 큰 복이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 또 사도 시대에는 성령을 받은 증거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에베소의 그 제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단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요한의 뒤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참 신자로서는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는 했으나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오셨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오신 것과 같았다(행 8:17).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 다 사도들을 통해 새 신자들이 성령을 받게 하셨다. 에베소의 그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고 확증하는 뜻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약 열두 명이었다. 그 열두 명 가량의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의 설립교인들이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령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신약 성도의 특권과 복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은 신약 아래 있었던 구약적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약속된 분이시며 그를 받는 것은 신약 성도의 특권과 복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그는 항상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성도들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어떤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또 성령께서는 우리로 선한 열매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 또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도하고 봉사할 힘과 능력을 항상 공급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관하여, 그것은 사도시대의 일시적 현상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은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그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성경 말씀의 교리들과 윤리적 교훈들로 충분하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교리들을 다 믿고 모든 생활 교훈들을 힘써 실천하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초자연적 은사가 아니라, 모든 죄를 떠나는 거룩한 삶과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속에서 거룩한 삶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 회당과 서원에서 (19:8-10)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8),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9).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0)."

  바울은 아마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강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석 달 동안 12번 이상 설교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요지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외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던 불경건한 삶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복종하는 삶이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담대히 강론하였고 권면하였다. 강론하다는 원어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을 뚯하며 권면하다는 원어는 설득하며 권하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진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다. 에베소 회당 안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굳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였다. 그들은 마치 딱딱한 길가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흙을 파서 고르지 않으면 씨가 심기울 수 없을 것이다. 통회하여 온유해진 마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받을 수 없다. 이 불신앙적인 자들은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비방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전도자의 말을 비방한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한 것이었고 하나님이 보내신 전도자를 거부한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다. 교제할 때가 있고 분리할 때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무리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이들이 섞여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무기력한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이들이 적을수록 그 교회는 힘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많은 수가 모이는 데 의미가 있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진실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모여 서로 사랑하고 주를 섬기는 데 의미가 있다. 적은 수라 하더라도 한 마음, 한 뜻으로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교회가 교회답다. 바울은 믿고 순종하는 그들을 위해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다. 말씀을 전하는 열심이 바울에게 있었고 말씀을 듣는 열심이 교인들에게 있었다.

  두 해 동안은 안식일이 100번 이상이다. 만일 일주일에 세 번씩 전했다면 그는 그 곳에서 300번 이상 설교 혹은 강론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어떤 삶이나 체험이 아니고 바른 사상에 입각한 삶이요 체험이다. 2년 동안의 바울의 말씀 사역을 통해 그 당시 로마의 한 행정구역인 아시아 지방에 주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었다.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듣게 되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풍성한 말씀의 잔치이었다.



 
다) 권력 대결 (19:11-20)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11),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2).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13).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14),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15),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6).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17),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18),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19).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얹으면 그 병들이 떠나고 악귀들 혹은 악령들도 나갔다. 어떤 마술하는 자들, 특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이 전한 예수의 이름으로 비슷한 흉내를 내다가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억제하여 이김으로 그들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행하는 기적을 통해 그가 전한 말씀이 진리임을 능력으로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에 주신 기적들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확증한 표이었다. 히브리서는 증거하기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했다(히 2:3-4).


  기적보다 더 놀라운 일은 많은 사람들의 회개이었다. 하나님의 복음과 능력의 일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다 두려운 마음을 가졌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고 믿은 자들은 많이 사도 앞에 와서 자복하고 행한 일들을 고하였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었다. 그 책값은 은 오만이나 되었다. 은 50,000은 당시의 보통 노동자가 50,000일 동안, 즉 137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떻게 철저하게 회개했으며 죄악된 일들을 청산했는가를 보여준다. 구원은 참된 회개 즉 죄의 청산을 동반한다. 죄의 청산은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한 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도의 역사이다.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었고 흥왕하고 세력을 얻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했고(행 6:7), 사도행전 12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증거했고(행 12:24), 본절에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곧 하나님의 힘이며 성령의 힘이다. 전도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힘 곧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라) 바울의 계획들(19:21-22)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21),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22)."
  
  바울은 2년 3개월 간의 에베소에서의 전도 사역을 마친 후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심령으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 즈음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말했다(16:8-9). 그의 에베소 전도 사역은 많은 결실을 맺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이상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깨닫고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무엇보다 설교와 성경공부가 중요하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와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자들이 다 수문 앞 광장에 모였고 학사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2-3, 8). 신약의 성도들도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기독교는 기적들을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주의는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다(고전 1:22-24).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기적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지만, 오늘날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외적인 기적을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중생(重生)과 회개와 믿음 등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내면적 기적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더불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셋째로, 참된 말씀의 사역은 참된 회개의 역사를 가져온다. 참된 회개는 죄의 청산을 동반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바른 말씀, 즉 성경적 설교와 강론을 통해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고 교회가 부흥하고 든든히 세워진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히 4: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우리는 오늘날도 참된 말씀, 성경적 설교와 강론이 힘있게 역사하기를 기도하자.


 
마) 에베소에서 폭동이 일어남 (19:23-41)
 
 
  * 데메드리오의 선동(23-27)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23),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24),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25),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26).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27)."

  바울의 2년 3개월 사역을 통해 에베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시아에 널리 증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던 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던 그 때에, 이 도(道)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 진리 운동에는 때때로 갈등과 싸움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화평을 주러 오지 않았고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마 10:34-39). 인간의 무지함이나 사탄의 역사로 인해 그런 갈등과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일하는 자들은 그런 소동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소동의 주동자는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었다. 그는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드는 일을 했다. 아데미는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던 이방신이며 '은감실'이란 은으로 만든 신주 궤를 가리킨다. 데메드리오와 그 직공들은 그 신주 궤를 만드는 일을 통해 적지 않은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우상숭배가 번창할수록 그들의 사업은 확장되었고 수입이 늘었을 것이다. 그런데 데메드리오는 바울의 전도가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공장의 직공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을 선동하며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한 내용, 그가 바울을 핍박하는 이유가 되는 내용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이 전하는 말 때문에 그들의 영업만 천하여지고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이 되고 그의 위엄도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잘못된 종교적 지식과 믿음에서 온 것이었다. 둘째는, 그 결과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가 되고 자기들의 유족한 생활의 기반이 되는 은감실 만드는 일이 쇠잔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 즉 소득 감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 관계의 싸움은 주로 이권 문제에서 생긴다. 물질적 이해 관계를 초월한 사람은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 소요가 일어남(28-3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28),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29).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30),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31).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33),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34)..."

  데메드리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이 가득하였다. 그의 말은 군중을 분노케 하는 데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의 소동은 확실히 감정적이었다. 그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하고 외쳤다. 온 성은 그로 인해 요란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같이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갔다. 바울도 그리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제자들이 말렸고 관원 중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도 그에게 통지하여 만류하였다.

  소동하는 무리들 속에는 오직 군중 심리만 있었다. 모인 자들 중 다수는 그들이 왜 모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이 말, 다른 이들은 저 말을 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정정당당하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없었고 그런 토론은 불가능하였다. 유대인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말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무리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며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쳤다. 에베소성에서의 소동의 실상은 그러하였다. 그것은 지극히 비인간적인 군중 심리이었다.



 * 서기장이 소요를 진정시킴(35-41)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35)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36).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37),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38),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39).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40),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41)."


  그 소동은 그 성의 서기장에 의해 겨우 진정되었다. 서기장은 사람들의 종교적 생각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는 그들이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거나 아데미 여신을 훼방하지 않은 자를 잡아온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모든 일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사람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때는 거기에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바울의 동역자 몇 사람을 체포, 구금한 것은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에 대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식으로 대처해서는 안되었다. 그 당시 에베소 성에는 재판 날들도 있었고 총독들도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송사할 일이 있으면 그는 정식 재판 절차를 밟아서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기장은 그 집회에 대해 지적을 받을 것을 염려하면서 정식 재판을 하라고 권면한 후 그 모임을 해산시켰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진리 운동에는 항상 싸움과 갈등이 있다. 모세의 광야 목회가 그러하였고 다윗의 국가 목회도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많은 싸움과 갈등을 이겨내셨다. 진리 운동에서 생기는 싸움과 갈등은 선한 싸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운동의 과정에서 보는 갈등과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싸움을 피해야 한다.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의 바울을 향한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었다. 첫째, 그들은 잘못된 지식 때문에 즉 이방신과 우상에 대한 잘못된 지식 때문에 싸웠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교훈 안에서 행하면 잘못된 지식이 교정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성경 안에서만 건전한 토의와 신사적 인격의 덕을 가질 수 있다. 둘째, 그들은 이권 때문에 싸웠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눈을 어둡게 하고 분별력을 없게 만든다. 셋째, 그들은 감정 때문에 싸웠다. 자존심이나 자신의 명예가 상한다고 느낄 때 사람은 감정적 싸움에 떨어지기 쉽다. 넷째, 그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싸웠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정당한 토론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류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합법적 절차를 따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서기장은 데메드리오에게 정식 재판을 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려면, 그 소송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그것이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있는지, 그것을 위해 원고와 피고가 발언할 기회를 가지는 정당한 사건 심리가 있는지 등을 살핀 후에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하물며 교인들이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그런 정당한 과정을 밟아서 정당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 아닌가? 교회는 정당하고 덕스러운 회의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참고: 도시 복음화에 대한 바울의 전략

가. 세속적 장소들을 택함.

나. 심사숙고하여 복음을 제시함.

다. 장기간에 걸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함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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