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음 과   빛   제3권   461호(월-금 발행)     Internet Daily Bible Study Institute

제목

 마리아와 마르다 (눅 10:38-42) 

묵상


  우리는 앞에서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주님께 질문을 했던 사건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 율법사는 주님을 책잡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 철저히 준비된 질문을 만들어서 주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회를 통해서 율법사의 사랑없음과 외식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때에 율법사는 자기의 외식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해서 그의 사랑없음과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 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율법사는 자신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사랑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원수일지라도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조건 없이 도와주는 것이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을 영접하는 마르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본문에는 오직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주님의 일행이 길을 갈 때에 한 촌에 들어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때가 언제이며, 또 주님의 일행이 들어간 마을이 어디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참고해 보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습니다(요 7:2, 10:22). 아마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요 11:1, 12:1)을 보면 본문에 나오는 마을은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으며, 이 곳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예루살렘에서 요단 동편 지역(트랜스 요르단)으로 가는 간선 도로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나, 예루살렘에서 나와 요단 동편으로 가실 때에 종종 이 마을에 들리곤 하셨습니다. 주님의 일행이 베다니에 들어갔을 때에 마르다라는 여인이 나와서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였고, 또한 나사로의 동생이 되었습니다(눅 10:39; 요 11:19-20; 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으며(요 11-12장), 마리아는 주님의 몸에 값진 향유를 부은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마르다의 가족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어의 여성형 명사입니다. 성경에는 그녀에게 남편이 있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지만, 일부 사람들은 (마 26:6)에 근거해서 그녀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 마리아와 마르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39-40)"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 부르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방문하셨을 때에 주님의 발 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아래 앉는다'는 말(파라카데스데이사)은 '곁에 앉는다'는 말로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행 22:3). 마리아는 존경하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주님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들었다'는 말(에쿠엔)은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다른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말씀만 경청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예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으며(본절), 죽은 오라비를 위해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요 11:32), 또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기 때문입니다(요 12:3). 그러나 마리아와 달리 언니인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분주하다'는 말(페리에스파토)은 '사방에서 끌어당기다'는 의미로서, 이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일로 인해 신경을 써야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마르다의 모습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태도와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주님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 동생이 같이 일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해서 주님께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아마 마르다는 혼자 음식을 준비하면서 바쁘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도와달라고 몇 번 신호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한 나머지 이러한 언니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화가 나서 주님에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이의 제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1) 자신이 그렇게 바쁜데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 2) 이런 사실을 알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주님에 대한 원망, 3) 지금의 상황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다는 확신. 그러면 주님은 이러한 마르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그때에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도다!" 주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마르다의 정성스러운 모습에 동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염려한다'는 말(메림나스)은 '흩어진다', 또는 '나누어진다'는 뜻을 가진 '메리조'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 말은 과도한 욕구로 인해 마음이 분열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근심한다'는 말(도뤼바제)은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뜻으로서, 이 말 역시 마르다가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주님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이 방문하는 시간을 생명의 말씀을 배우는 기회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의 방문 시간을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시켜 줄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많은 일로 분주해하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로서 각 사본들도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몇 가지'와 '한 가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에 언급된 '몇 가지'와 '한 가지'를 모두 음식의 수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르다가 너무 많은 음식을 만들려고 하다가 분주해 졌기 때문에, 주님은 그녀를 보시고 음식의 수를 줄이거나,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또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에 언급된 '몇 가지'는 '물질적인 것'을, 그리고 '한 가지'는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르다가 물질적인 음식을 대접하느라고 마음이 분주해졌으며, 주님은 이를 보시고 그녀에게 영적인 일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을 권고했다고 주장합니다. 두 해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는 것은 "두 번째 견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님께서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마르다가 한 일과 마리아가 한 일을 모두 인정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르다가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쉴새없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르다에게 동생이 "좋은 편을 선택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내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더 가르쳐 주려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러한 주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에, 주님의 방문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모든 관심을 많은 음식을 대접하는 일에만 힘과 정력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르다에게 간단히 음식을 먹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곧 세상을 떠나시면 더 이상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주님께서 방문하셨을 때에 마리아와 마르다는 어떻게 주님을 대접했는가?

2. 우리는 마르다처럼 여러 가지 주님의 일로 분주해서 짜증을 낸 적은 없는가? 그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3.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는 어느 편을 선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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