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과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1. 마카비 전 시대(페르시아, 헬라, 애굽, 시리아 지배 시대)

 1) 메디아 페르시아의 유대 지배(주전 536년-331년)
  # 페르시아는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리  피정복 국민을 자치 형식을 통해 통치함
  #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에 따라 유대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됨(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시대).
  # 사마리아인들과의 갈등
  # 말라기


    
<페르시아 왕>                              <이스라엘 역사>

  * 고레스(538-530)                      * 세스바살 인솔 하에 귀환
                                           제단이 세워짐
                                           성전 공사 착수(여호수아, 스룹바벨)
  * 캄비세스(530-522)                    * 성전공사 중단(사마리아인과의 갈등)
  * 다리오 1세(522-486)                  * 성전공사 재개(520년; 학개, 스가랴)
                                         * 성전 봉헌(515년)
  * 사스다 1세(486-465)
  * 아닥사스다 1세(465-424)              * 에스라(457), 느헤미야(444)의 귀환
  * 사스다 2세(424-423)                  * 성곽 건축, 율법 연구
  * 다리오 2세(423-404)
  * 아닥사스다 2세(403-358)              * 말라기(느헤미야 귀환)
  * 아닥사스다 3세(358-338)
  * 아르세스 1세(338-3360
  * 다리오 3세(336-331)

                          <페르시아 시대의 성경 역사>

 

 2) 헬라의 유대 통치(알렉산더-주전 336-323년)
  #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복(333년)-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를 물리치고 광대한 영토를 가진 헬라 제국을 건설함- 왕이 된 지 14년만에 바벨론에서 죽음(323년)

  # 알렉산더 사후-그의 부하인 4장군이 헬라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서 차지함: 카산더(마게도냐, 헬라), 리시마쿠스(동북부의 트리키아), 톨레미(이집트), 셀류코스(시리아)

  # 알렉산더의 헬라화 정책-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잃기는 했으나 문화적인 동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인 보다 나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헬라 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라졌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마다 지혜를 강조하였고 헬라주의를 심으려고 하였다. 헬라는 교육을 통해서 인도주의 문화를 건설하였고, 유대인들에게 헬라 화를 강요했고, 제우스를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은 헬라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톨레미(애굽)의 유대 통치(주전 323-198년)
   애굽을 통치했던 톨레미 왕가가 유대를 주전 323년부터 198년까지 통치함.  


 
4) 셀류코스(시리아)의 유대 통치(주전 198-165년)
   주전 198년에 유대가 톨레미 왕가에서 시리아의 왕 셀류코스 왕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

 * 안디오쿠스 4세의 유대인 박해 정책(주전 175-163년)
   a. 성직 매매: 종신직인 대제사장직을 매매함
   원래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오니아스가 대제사장이었으나, 헬라화를 지지하는 그 동생 야손이 안티오쿠스에게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낸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직이 넘어갔다. 이로 인해 성전은 시리아에 의해 마음대로 약탈당하게 되었다.

   b. 유대인 박해 정책  
  * 유대인의 율법 준수를 금하고, 제단에 희생을 드리는 것과 절기 준수하는 것을 금지함. 거역하는 자는 반역죄로 간주.

  * 성전 제단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함

  * 애굽과의 1, 2차 전쟁(주전 169, 168년)에서 패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약탈함. 그러나 로마 장군인 포필리우스가 철수를 지시하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대에 헬라화를 강요하였으며, 자신을 "에피파네스"(현저한 자)라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조롱하여 "에피마네스"(미친 자)라고 불렀다.
 

        <헬라 제국>                               <이스라엘>

 * 알렉산더 대왕(336-323)
 * 톨레미가의 팔레스틴 통치(323-198)
 * 셀류코스가의 팔레스틴 통치(198-165)
 * 안티오쿠스 3세(223-187)
 * 셀류코스 4세(183-175)
 * 안티오쿠스 4세(175-163)              * 성직 매매(야손, 메넬라우스)                                         * 율법 준수 금지(제사, 절기 금지)
                                        * 성전모독(제우스신상, 돼지 제물)
                                        * 유대인 봉기(마타디아, 하시딤)
                                        * 유다 마카베오(166-160)
                                        * 성전 재봉헌(164년 12월 24일)
 * 안티오쿠스 5세(163-162)              * 하시딤의 헬라 항거 중단
 * 데메트리우스 1세(162-150)            * 메넬라우스 제거(유다 마카비)
                                        * 알키무스 임명(데메트리우스 1세)
 * 알렉산더 발라스(150-145)             * 요나단 마카베오(160-142)
                                        * 알렉산더 발라스 지지-요나단을 총독
                                          제사장으로 임명. 하시딤과 멀어짐
 * 데메트리우스 2세(145-139)            * 요나단이 데메트리우스 2세 지지
 * 안티오쿠스 6세(139-134)              * 안티오쿠스를 6세 지지하는 트리포
                                          가 요나단을 제거함(142)
                                        * 시몬 마카베오(142-134)(시리아축출)

                         <헬라 제국과 이스라엘 역사>

 

2. 마카비 시대(주전 166-139년)

 1) 제사장 맛다디아의 봉기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정책에 반대하여, 목숨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다. 어느 날 하스모니아라고 하는 집의 가장이었던 마타디아가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던 자를 죽이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이 세력에 연합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배교한 유대인들을 척결함. 그러나 마타디아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함.

 2) 유다 마카베오(166-160년)
   마타디아의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대를 인도함. 그는 시리아 요새를 점령하였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제단에 제사를 다시 드릴 수 있게 됨. 시리아는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왕의 후견인인 루시아가 철수 명령을 내림으로 공격이 중단됨. 이로 인해 유다는 다시 율법을 준수할 수 있게 됨. 마카베오는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산 메넬라우스를 제거하였다. 그러자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 1세가 또 다시 헬라화를 지지하는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헬라화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아론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하시딤')은 자기들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헬라에 항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는 정치적인 독립을 얻어야 진정한 종교적인 독립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시리아에 항거하였다. 그는 주전 160년에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며, 헬라화를 지지하던 대제사장 알키무스도 주전 160년 말에 죽고 대제사장직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3) 요나단 마카베오(주전 160-142년)
   마카베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요나단 마카베오가 그 뒤를 이었다(주전 160-142년). 요나단은 데메트리우스 1세와 정적이었던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하였는데, 결국 왕권 다툼은 알렉산더 발라스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 발라스는 자신을 지지해 준 요나단 마카베오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공석이었던 대제사장직까지 겸임하게 해 주었다(주전 153년).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하시딤')은 많은 피를 흘린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마카베오 가문과 멀어지게 되었다.    

 4) 시몬 마카베오(주전 142-134년)
   그러나 자칭 안디오쿠스 4세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일어나서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다시 왕권을 탈취하였으며, 그는 자신을 데메트리우스 2세라고 불렀다. 후에 데메트리우스 2세는 안티오쿠스 6세와 다시 세력 다툼을 하게되었다. 이때에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라는 자가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 마카베오를 죽여버렸다(주전 142년). 요나단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 동생인 시몬 마카베오였다(142-134년). 시몬은 유다 군대의 총 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하였다. 그는 마침내 시리아 군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주전 142년). 그리고 시리아에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나라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유대 백성들은 유대의 통치권을 시몬의 가문에 세습시킬 것을 결의했다(주전 140년). 그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으며, 하스모니안 왕가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는 시리아에 가장 먼저 항거했던 마타디아의 아버지인 하스몬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3. 하스모니안 왕국

 1) 요한 힐카누스 1세(134-104)
  #  시몬이 사위(톨레미)에 의해 살해된 후, 그 뒤를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1세가 계승함.
  # 지배권 확장: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하고 사마리아인들의 성지를 빼앗았다.   # 바리새인과의 갈등 지속
   아론의 자손이 아니면서 대제사장 직을 맡음-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 지속됨. 바리새인들은 정치, 군사적인 일에 손을 끊고, 율법 연구와 그 율법을 삶에 적용시키는 일에 전념함.
  # 사두개파 시조:
   바리새인들이 돌아선 것을 본 요한은 그들의 지지를 요구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주의적인 정치를 추구하였으며, 헬라주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게 되었다. 이러한 제사장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후에 사두개파를 형성하게 된다.

 2) 아리스토 불루스 1세(주전 104-103년)
  # 요한 힐카누스는 자기가 죽은 후에 그의 부인이 통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아리스토 불루스가 자기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명의 동생들을 감금시켰다. 그리고 자기 형제인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는 최초로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3)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
  # 아리스토 블루스가 죽게되자,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살로메는 감옥에 갇혔던 형제들을 풀어주고, 첫째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왕으로 삼고 그의 아내가 되었다. 

 4) 알렉산드라 살로메(주전 76-67년)
   얀네우스는 죽으면서 바리새인들과 화해할 것을 당부하였다. 유대는 그의 아내인 살로메에 의해서 9년간 다스려졌다. 그녀는 남편의 유언을 따라 바리새인들은 다시 산헤드린의 회원으로 세웠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을 통해서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 정책을 반대하였고, 살로메의 둘째 아들이었던 아리스토 불루스 2세가 이 반대 세력에 앞장섰다.

 5) 아리스토 블루스 2세(주전 67-63년)
   살로메가 죽게되자 장남인 힐카누스 2세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차자인 아리스토 불루스 2세가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안티파텔이라는 사람이 힐카누스를 지지하여 그에게 왕위를 주기 위해서 다메섹의 아레타스 왕과 함께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4.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1) 힐카누스 2세(주전 63-40년)-로마의 속국이 됨
   이때에 로마의 폼페이는 마침내 시리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따라서 로마는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차남이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힐카누스 2세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폼페이는 로마를 반대하던 아리스토 불루스 2세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로마에 조공을 드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에 폼페이는 또 다시 줄리어스 시이저와 정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에 힐카누스 2세와 헤롯의 부친이었던 안티파텔이 시이저를 지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시이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시이저는 자기를 지지해 준 힐카누스 2세를 유다의 분봉왕으로 삼았으며, 안티파텔을 유다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헤롯에게는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였다. 시이저는 주전 44년에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힐카누스 가의 잔을 맡은 자가 주전 43년에 동료인 안티파텔을 독살함으로 힐카누스 가문과 안티파텔 가문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힐카누스 2세가 자신의 손녀 마리암네를 헤롯과 결혼을 시킴으로 이 두 가문은 사돈간이 되었다.


 2) 안티고누스 2세(주전 40-37년)

   주전 40년에 카시우스가 시리아를 점령하였으나, 카시우스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후에 시이저를 지지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힐카누스 2세의 귀를 잘라 바벨론으로 추방해 버렸으며, 안티파텔의 아들인 파사엘은 자살을 하였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해 준 안티고누스 2세를 왕으로 세웠다.

        <로마 제국>                                <이스라엘>

 

 * 폼페이 예루살렘 입성(63년)           * 힐카누스 2세(로마 도움 요청)
                                            유대가 로마 속국이 됨.
 * 줄리어스 시이저                      * 힐카누스 2세, 안티파텔이 시이저 지지
                                        * 시이저가 승리한 후 이들은 분봉왕과
                                          태수가 됨
 * 줄리어스 시이저 암살(44년)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시이저를  *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승리        지지하고 자기를 반대한 힐카누스 2세
                                          와 안티파텔을 제거함. 자기를 지지한
                                          안티고누스 2세를 왕으로 세움.
 * 옥타비아누스 승리(31년)              * 헤롯이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 왕이 됨.
                                        * 처음-안토니우스지지-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로마로 찾아가 속죄-옥타비아
                                          누스는 그를 용서하고 유대 왕을 삼음.
                                        * 하스모니안 통치 종결


3) 헤롯 대왕(주전 37-4년)
   이때에 헤롯은 로마로 도망을 하였고, 후에 그는 로마의 도움을 받아 유다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약 100여년간의 하스모니안 통치가 종결되었다. 헤롯은 이두메아인(에돔인)으로서 머리가 비상한 책략가였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그는 주전 31년까지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정권 다툼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에게 찾아가서 왕관을 벗어들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하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다.

 가. 통치 초기-권력 기반 마련을 위한 피의 숙청-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왕족인 아내와 장모, 동서, 그리고 힐카누스 2세까지 처형시킴.

 나. 통치 중기-건축 사업-
   수많은 건축 공사를 함. 그는 황제 신전,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그리고 새 도시를 건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그리스-로마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주전 20-주후 63년),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름을 따서 세바스테라 불렀고, 가이사랴에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요새와 왕궁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헬라주의자들만 요직에 앉힘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다.

 다. 통치 말기
   자기의 아들을 모두 죽임(주전 7년). 주전 4년에 여리고에서 죽음을 당함. 마태는 바로 이 헤롯 때에 아기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하였다(마 2:1).     

 라. 헤롯의 아들과 손자들
   헤롯이 죽은 뒤에 그의 유언에 따라 유대 영토는 셋으로 분할되어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다. 그리하여 아켈라오는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 빌립은 북동쪽,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가) 아켈라오(남쪽-폭정으로 폐위되고 총독이 통치하게 됨)
   그는 분봉왕이란 칭호를 가지고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을 9년동안 다스렸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잔인하고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폭정을 하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들은 아구스도 황제를 찾아가 그의 잔인성과 권력욕을 고소하여 그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아구스도 황제는 그가 오랜 통치가 대규모의 반란을 야기시킬 것을 염려하여 6년에 그를 파면하고 추방하였다. 그 결과 6년에 그의 영토는 로마의 총독에게 돌려지게 되었다.

  나) 빌립(북동쪽 지역)
   그는 북동쪽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요단 동쪽 상류 지역에 파네이온을 재 설립, 확장하여 수도로 만들고 가이사 황제를 존경하는 뜻으로 "가이사랴"라고 불렀는데, 지중해 해안에 있는 또 하나의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서 이를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그는 중용을 취한 관대하고 정직한 통치자로 헤롯의 아들 가운데 가장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 중에 이 영토에서 적들에게 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활동하실 수 있었다.   

  다) 안디바(갈릴리와 베뢰아)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신약 성경에 가장 잘 알려진 안디바는 헤롯의 아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여우"라고 부르셨다(눅 13:32). 그는 그의 아버지 헤롯 1세처럼 헬라 문화의 장려자이며, 위대한 건설가였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갈릴리 바다 서해안에 있는 디베랴 도성이었다. 이것은 그가 황제 디베료(22년)를 기념하여 명명한 것이었다. 그는 아라비아 아레타스 왕의 딸인 나바티안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후에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였고, 결국 그는 본부인을 내어쫓고 형제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을 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그를 책망하다가 투옥되었다. 헤로디아는 왕의 생일에 전 남편인 빌립에게서 난 딸 살로메를 춤을 추게 하였다. 안디바는 그녀의 춤을 보고 너무 기뻐서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그 어미의 지시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안디바가 승낙함으로 세례 요한은 죽임을 당했다(막 10:11).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를 느낀 아레스터 왕은 기회를 보다가 36년에 베뢰아를 침공하여 안디바의 군대를 쳤다. 이에 39년에 안디바는 로마에 청원하여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그립바 1세(헤롯 1세가 죽인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가 먼저 안디바의 부정을 로마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황제는 안디바를 분봉왕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그 대신 아그립바 1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라)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죽였으며(행 12:1-3), 베드로를 체포하였고 초대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혔으며 44년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17세밖에 안된 아그립바 2세(행 25장)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연소함으로 인해 이때부터 이 지역은 로마의 영토나 다름없이 지배를 받았다. 66년에 이 지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으나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70년 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5. 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1) 유대 전쟁(66-73년)
   유대인들은 로마 점령군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증오하게 되었다. 가이사랴에서 반 유대인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유대인들은 로마군에게 진압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방관만 하고있었다. 지방 총독이었던 게시우스 플로루스(Gesius Florus)는 66년에 성전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하였으며, 유대인들은 그를 조소하였다. 이에 격분한 총독은 가이사랴에서 2개 대대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폭도들에 의해 1개 대대는 흩어지고, 1개 대대만 안토니오 요새에서 저항하고 있었으며, 총독은 가이사랴로 후퇴하고 말았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드리던 황제에게 봉헌하는 제물을 중지시켰고 이를 말리려던 대제사장은 암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리아에 있던 로마 총독 제스티우스(Gestius)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왔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유대인들에게 패배하고 시리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곧 닥쳐올 로마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하여 전열을 정비하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가장 용맹한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왔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그리고 티투스는 이집트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들의 첫번째 공격 지역은 젊은 사제 요세푸스가 있었던 북부 지방인 갈릴리였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47일간 항쟁하다가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으며,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는 로마 사령부에 머물면서 "유대 전쟁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혁명 당원(열심당)의 지도자인 요한네스는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고, 67년에 갈릴리 전체는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요한네스와 기오라가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었으며,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요단에 있는 페트라로 도망하였다. 69년에는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인 티투스만 남아 전쟁을 지휘하였다. 마침내 티투스는 70년에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였다. 성전은 불에 타서 약탈을 당하였으며, 지도자인 요한네스와 기오라는 로마로 압송되었다. 끝까지 마사다에서 죽기로 항전하던 전사들도 마침내 73년(또는 74년 초)에 점령당하게 되었다. 전쟁 후에 황제 베스파시안은 유대를 사마리아에서 분리시켜 황제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 총독이 다시 가이사랴에서 집무하게 되었고, 이 곳에는 로마의 제 10군단이 상주하였다. 성전이 무너지게 되자, 이제는 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한 회당이 유대인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후 로마는 회당을 보호해 주었다. 얌니아에서는 사제와 장로들은 회원이 되지 못하였고, 율법 학자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이 유대인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였다.


 2) 바르 코흐바(별의 아들)의 폭동(132-135년)

   하드리안 황제(117-138년)의 통치 때에 유대인들의 봉기가 또 일어났다. 하드리안은 130-131년에 동양을 여행하는 중에 예루살렘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고,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시키라는 지시를 하였다. 성소에 이방 신전을 세우고 할례를 금지 당한 유대인들은 분노하였다. 분노한 폭도들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기습하여 점령하여 성전에서 다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새로 얻은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고 이 해를 첫 해로 하는 새로운 기원을 세웠다.  이 폭동의 지도자는 당시에 존경을 받던 랍비 아키바(Aqiba)였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민 24:27)에 예언된 약속된 '별의 아들'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해를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기독인들은 아키바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기독인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로마군의 공격에 유대인들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키바를 메시야로 보던 백성들은 점차 실망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로마군이 그들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성전에는 다시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고,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유대인들의 출입이 중지되었다. 그들은 4세기에 이르러서 아브월(7-8월) 9일에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한 쪽 벽에서 통곡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폭동을 지지하던 수많은 율법학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며, 아키바는 처참하게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죽음은 유대인들을 다시 율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었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6.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정치

 1) 아우구스투스(주전 2-주후 14년; 눅 2:1)
   시이저는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 후 독재 정치를 펴다가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주전 44년). 그리고 그 뒤에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여왕과 함께)와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놓고 다투다가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장악 한 후에 자신에게 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붙였다. 그는 전쟁을 중지하고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펴서 온 제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수많은 건축을 했으며 특히 곳곳마다 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내적인 개혁도 감행해서 용기와 정의, 그리고 도덕과 교육을 진흥시키려 하였다. 이때에 로마는 윤리적으로 크게 부패해 있었다(롬 1;18-32)  

 2) 티베리우스(14-27년; 눅 3:1)
   아우구스투스가 14년에 76세의 나이로 죽게되자, 그의 양자로서 56세의 장군이며 정치가였던 티베리우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질서 있는 행정을 계속 진행하였다. 이때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26-36년), 세례 요한이 등장하였으며(눅 3;1), 그리스도께서 유대에서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후에 다시 부활하셨다.      

 3) 칼리굴라(37-41)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불과 25세의 칼리굴라가 뒤를 이었다. 그는 방종한 생활과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일로 인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의 주위에는 온갖 부패한 정치가들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때에 헤롯 아그립바 1세도 칼리굴라의 호의를 얻어 팔레스타인의 정권을 얻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그의 입상을 세우려 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짧은 기간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궁중 혁명으로 인해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41년).

 4) 클라우디우스(41-54년; 행 11:28; 행 18:2)
   친위대는 칼리굴라의 숙부였던 클라디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는 정직하였으며 양심에 따라 통치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따라 관용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그는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행 18:2).

 5) 네로(54-68년; 행 25:10-12, 27:24, 딤후 4:1-17)
   그러나 그의 부인 아그립피나는 그를 독살하고 그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네로는 이때에 17세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철학자였던 세네카에 의해 그 직무가 대행되었다. 이때에 로마는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로가 정치를 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도시를 불살랐다는 누명을 씌워서 박해하였다. 이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누명을 쓰고 짐승의 밥이 되고, 불에 타서 죽임을 당했다.     

 6) 베스파시안(68-79년; 예루살렘성 멸망)
   네로가 죽게 되자 스페인에서는 갈바가, 로마에서는 오토가, 그리고 독일에서는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모두 황제로 추대되지 못하게 되자, 이로 인해 로마는 새로운 내란의 위험이 직면했다. 바로 이때에 팔레스타인 원정에 참여했던 베스파시안이 그의 군대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7) 티투스(79-81년)
베스파시안이 죽은 후에 황제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티투스에게 돌아갔다.  

 8) 도미티안(81-96년)-황제숭배 시작-
   그리고 3년 뒤에는 다시 도미티안이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신성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96년에 그는 반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9) 네르바(97-98년)
   도미티안의 뒤를 이은 황제는 네르바였다. 그는 스토아 사상에 의거하여 통치하려고 했다. 그는 스토아 정신을 따라 가장 선한 자가 통치를 하고, 그의 직무는 국민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따랐다.

 10) 트라얀(98-117년)
   네르바는 장군인 트라얀을 그의 양자로 삼았으며, 그가 네르바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트라얀은 인도주의적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11) 하드리안(118-138년; 132-135년 바르 코흐바의 폭동)
   트라얀의 뒤를 이어 세계적인 군주로 알려진 하드리안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할례를 금지하였고, 예루살렘에 주피터를 위한 신전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일은 유대인의 거센 반발로 이어졌고 바르 코흐바의 지도 아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12)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 13) 아우렐리우스(161-180년)
   항상 진리를 추구하였고 철학적인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함. 스토아 철학에 의해 인도주의 정신을 가지고 그 이상에 충실해 보려고 노력했던 군주들은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단절되었다. 그 이후 로마는 항상 평화가 유지되지 못했고, 내외적인 충돌은 군사적인 개입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내적인 번영과 함께 헬라주의적-로마적 문화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발전하였으며,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참고: "황제 숭배에 대해서">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다. 도미티안 이전에도 네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회를 크게 박해하였으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는 사람들이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그런데 이 "로마의 정신"이 후에는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데로 발전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브라데,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통합의 원리로 "가이사 숭배사상" 즉 "황제 숭배사상"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완전히 없애고 황제숭배를 절대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시다!" 라고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렇게 한 후에 얼마든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숭배와 황제를 주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으며,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나, 아직 로마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에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 당시 교회들 중에 일부 교회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무능력한 교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도 또 다른 한 쪽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이렇게 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